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건제 (문단 편집) ==== [[나바라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 이베리아 반도는 애초에 중세는 '''[[레콩키스타]]'''로 점철되어 있어서 [[피레네 산맥]] 이북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애초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마지막 보루로 삼은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그 근원이었고, 그에 따라 프랑크 제국식 행정에 근원을 두는 봉건 제도는 애초에 발전하지도 않았다. 백작(count)과 공작(dux) 자체는 존재했으나, 그것은 로마법이 공통된 근원이어서 이름이 겹쳤을 뿐, 프랑크 왕국의 그것과 성격이 같지는 않았다. 이베리아 북쪽에서 군벌들이 지방을 장악하며 사후에 저러한 관직명을 얻은 것과 달리, 이베리아 국가들은 정복지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기독교 유민들을 정착 시키는 등 행정적 장악을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서고트 왕국 시절부터 로마식 법제가 잘 유지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 위주의 행정과 의회 개념이 잘 이어졌다. 의회(cortes)에 투표권이 있는 주도급 각 도시들은 일부 교구와 귀족의 라티푼디움을 제외한 주변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스페인, 포르투갈은 대토지 귀족이 군벌로 성장하여 왕에게 개기는 일보다는, 의회에서 귀족들만이 아닌 도시 부르주아나 성직 귀족들 등 다양한 계층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충돌하고 왕은 그러한 문제들을 조율하는 위치로서 권위를 행사했다. 말하자면 동시대의 북이탈리아랑 비슷한데 왕과 의회가 있어서 내전에 덜 시달리는 상황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기 위해 대서양으로 나간 것도 포르투갈은 대토지 귀족보다는 상인과 도시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