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두완 (문단 편집) == 일생 == 1935년 [[황해도]](현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9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62~1968년까지 [[한국일보]] 미주특파원으로 근무했고,[* 이로 인해 영어에 매우 능통하다. '봉카이트'라는 그의 별명처럼 월터 크롱카이트의 발음을 연상시키는 당시 미국 방송가의 억양으로 말한다.] 1969년부터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동양방송]] 논평위원으로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의 앵커를 맡았다. 이 때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1호 [[앵커]]맨"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봉두완]]의 뉴스전망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내놓기도 했는데, [[육영수]]가 애청하던 방송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영향으로 인해 청와대에 초청되기도 했었다.] [youtube(uH1v6g_7uag)] 기자로 재직하며 'TBC 뉴스전망대'라는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클로징 멘션이[* '''"0000년 0월 0일 TBC 뉴스전망대에서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라는 멘션으로 시작해서 그날 그날의 시국 상황 등을 요약한 멘션을 날렸는데 이 멘션에 뼈가 있어서 촌철살인이었다는 평이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3선 개헌 직후에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 깜깜합니다. 왜냐면 밤이니까요." 라는 멘션을 날리기도 했다. 이 멘트는 코미디언 김병조가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서 진행하던 뉴스 형식의 코미디 코너에서 이 멘션을 거의 비슷하게 마무리 멘션으로 쓰기도 했다. 70년대 생들은 이쪽만 기억하는 경우가 있으며 후술할 1998년 겔포스 광고에서도 써먹었다. 최일구 앵커도 어릴때 이 앵커를 보고 인상깊어서 후에 특유의 멘션스타일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명했다. 당연하겠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2010년대의 [[손석희]]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더군다나 당대 언론통제가 일상화 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예를 들면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에 처한 일이나 경향신문을 강제로 야당지에서 여당지로 만든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자 동아일보에 각종 압력을 행사하여 굴복시키고 기자들을 해고시킨 일을 예시로 들수있다.] 어찌어찌 해고당허가나 고문받지 않는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물론 너무 유명했던 인물인지라 함부로 집어넣었다가 난리가 날게 뻔해서 못 집어넣은것에 가깝다고 봐야되겠지만 말이다. [* 마찬가지로 [[고바우 영감]]의 작가인 김성환도 당대에 독재정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곤 했는데 고문이 당연시되던 시절임에도 딱히 고문같은것을 당해본적은 없다고 전해진다, 다만 검열때문에 상당수 연재분이 검열삭제되는 비운(?)은 맞기는 했다.] 1970년대에는 라디오의 뉴스전망대와 뉴스논평, 2시취재현장, TV의 [[TBC 석간]], 동서남북, 봉두완입니다까지 거의 모든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전담하다시피한 스타앵커였다. 그는 미국 CBS 뉴스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에 비견되어 '봉카이트'란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직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용기있는 참 언론인에서 '''신군부의 부역자'''로 전락하게 된다.[* 더군다나 1980년 7~8월에 걸쳐서 신군부의 압력으로 기자들과 PD들이 대규모로 해고당하는 일이 벌어진데다가 언론통폐합으로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가 사라졌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도의를 저버렸다고해도 할말이 없었으니 더더욱 까일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동양방송 폐국 다음날인 12월 1일 민정당 발기인 명단에 봉두완의 이름이 있었다. 동료 [[강용식]] 보도국 부국장 역시 폐국 전에 KBS로 이직해 보도국장으로서 [[땡전뉴스]] 제작을 총지휘했다.] [[허삼수]], [[허화평]]이 가톨릭 신자인 것을 인연으로 끌어들인 것. 더 골때리는 건 허삼수와 한강동 본당에 다녔는데 주임신부가 민주화에 앞장선 [[함세웅]] 신부였다고(...) [[파일:external/www.dtoday.co.kr/20120515164140_4037.jpg]] 1981년 1월 15일 민정당 창당 당시 사회를 맡았고,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로서 [[서울특별시]] [[마포구]]-[[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재영(1934)|김재영]]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는데 이름값이 있었고, 이때 거물인사 상당수가 출마하지 못한 영향도 있기에 46.8%로 [[이종찬(1936)|이종찬]]에 이어서 서울에서 2번째로 득표율이 높은 민정당 당선자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같은 해 4월부터 1982년 5월까지 민주정의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에는 [[대한민국 국회|국회]] 외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외무위원장으로 선출된 직후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미국 [[ABC(미국)|ABC]] 나이트라인에 1983년 11월 10일[* 당시 보도 제목은 A Fragile Peace: North and South Korea였다. 조선일보에서는 봉두완이 미국 방송에 출연한다는 소식만 짧게 전하고, 김대중이 나온다는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당시 토론에는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 당시 미국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도 함께 참석했다. 원래 나이트라인은 AFKN에서도 매일 방송분을 녹화했다가 틀어줬는데, 이날 방송만큼은 원래 편성표에 있었는데도 결방되었다. 당시는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던 타이밍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레이건 행정부 입장에서는 괜히 이를 방송해서 김대중을 띄워주고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느니, 조용히 넘어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방송분은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출연해 당시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김대중]]과 한국의 인권과 안보 상황에 대해 영상 토론했다. 능변과 교묘한 논리로 전두환 정권을 방어하였다. >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KBS 스튜디오가 가장 악랄한 북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으로부터 고작 28마일밖에 안 되는데 민주주의 한답시고 그런 위협 속에 민주적 절차에 의한 두 번째 총선을 치르고 있다. 국회도 선거를 통해 구성했고. 우리는 아직도 남북이 대치 중에 있어. 미국하고는 달라. 나도 너처럼 앵커맨 출신이야. 그 당시 방송할 때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나는 그래도 몇 마디 지껄이고 살았어.[* 민완기자 출신의 앵커였던 테드 카플은 봉두완의 이 발언에 대해 '몇 마디?'라고 되물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카플은 김대중에게 동정적이었다.]" 이 말은 당시 ABC 나이트라인의 앵커맨이던 테드 카플에게 한 것으로, "나도 너처럼 앵커맨" 이라는 말은 봉두완, 테드 카플이 앵커맨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http://www.d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885|# 봉두완의 회고를 다시 인용]] > "지금까지 김대중 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때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인권 유린도 없다'''." 하지만 김대중은 카플에게 발언을 끝내 얻어내어 [[유엔]] [[국제사면위원회]]와 미국 국무성의 [[1982년]] 보고서를 인용했다는 말로 논란을 잠재웠다. 봉두완의 승리를 예상하고 전 교포들에게 라디오를 홍보했던 정부로서는 제대로 관광당한 셈(...)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35921.html|#]] [[이희호]] 여사의 회고. [[https://brunch.co.kr/@koredian/8|# 김대중 본인의 회고]] 전두환은 일단 김대중과 토론에 나선 자체를 칭찬한 반면, [[권익현]] 사무총장에게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http://www.d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885|# 봉두완의 회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여당 후보로서 최다인 16여만표를 기록해 [[신한민주당]] [[노승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중선거구제]]라 2위임에도 당선되었고 득표율도 27.5%로 저조했다. 같은 해부터 1987년까지 국회 외무위원장으로 연이어 활동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태우]]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색깔 지우기로 공천에서 탈락했고, 그 충격과 배신감으로 3개월간 팔다리 마비와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1989년 10월부터 MBC 라디오 <여성시대> MC를 거쳐 1990년부터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앵커를 맡아 노태우 정권을 저격해왔고, 특히 1991년 수서사건 논평에선 청와대 개입설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92년 [[통일국민당]]에 들어가 선거방송 특별대책위원장 등을 맡았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용산구(선거구)|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자유당]] [[서정화(1933)|서정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3년부터 8년간 [[광운대학교]] 인문사회대학 신문방송학과 교수로서 강단에 섰고, 2001년 석좌교수로 추대됐다. 그 와중에도 1994~1998년까지 KBS 제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진행을 맡아 1995년과 1996년에 광장커뮤니케이션 및 KBS 정책연구실에 의해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으로 각각 선정됐고, 1997년에는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 10걸 중 9위에 뽑혔다. 다만 1997년 15대 대선정국 때는 [[이회창]] 편들기로 선거방송특별위원회의 주의를 세 차례 받았고, 방송기자클럽 주최 이회창 후보토론회 사회자로 나선 바 있다. 그러나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자 입장을 바꾸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했고, 계속 반 한나라당 논조로 가다가 한나라당으로부터 교체 요구까지 받아 결국 KBS 측으로부터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22500289120005&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8-02-25&officeId=00028&pageNo=20&printNo=3125&publishType=00010|경고 조치를 받았다]]. 1999년 1월부터 2년간 앵커를 맡으며 특유의 카리스마로 고등학생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팬층을 보유했고, 이후 아리랑TV를 거쳐 2002년에 iTV 토론방송 <봉두완의 진단 2002>를 통해 지상파 브라운관으로도 잠깐 복귀했다가, 2005년 한방건강TV <봉두완의 의료계 진단>으로 돌아왔다. 그해 9월부터 [[원음방송]] 시사프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MC를 맡기도 했다. 그 사이 선거 때마다 출마설이 나돌곤 하지만 정치와는 담을 쌓고 있다. 그 외에 1998년부터 4년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고, 보수/가톨릭 인사로서 성 라자로마을돕기 회장을 비롯해 천주교북한선교후원회장, 남북한장애인걷기운동 고문, 생활개혁실천 범국민운동협의회 운영위원장,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대표, 천주교민족화해센터 및 천주교한민족돕기회의 회장 등을 맡았고, [[2003년]] [[3.1절]] 집회에서는 [[이철승]] 당시 자유민족민주회의 회장을 두고 "[[전라도]] 사람입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4721.html#cb|#]] 이후 '반핵반김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재정위원장을 거쳐 2004년에 4기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2006년에 전/현직 주미특파원 친목단체 '한미클럽'을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다가 2018년에 자문위원장이 되어 운영 일선에서 물러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