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소전쟁 (문단 편집) === 소련의 총공격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VZHD_1929_01.jpg|width=100%]] || || 동북육군 15여단의 독전기를 노획한 소련군 || 9월 19일,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공군과 해군, 해군보병을 앞세운 소련군은 9월 19일 수병을 함락시키고 10월 10일에 아무르 함대를 동원, 동북군의 강방함대를 공격하여 10월 12일 삼강구에서 격멸시켰다. 동북군 포함 1척, 무장함선 3척이 격침되고 250명이 전사, 15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10월 12일 동강이 함락되었다. 하지만 중앙은 [[2차 장풍전쟁]]에 대응하느라 장쉐량을 도울 여력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10월 19일, 비밀리에 서북내전을 평정하는 것이 소련군을 방어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면서 중화기의 대여를 요청했다. 이에 장쉐량은 표면적으로 장제스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며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한 후 10월 22일 개인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를 파견하여 카라한에게 비공식적으로 교섭 의사를 타진했다. 이러한 장쉐량의 교섭 움직임엔, 장쉐량이 군사적으로 너무 참담하게 패배한 것도 있었지만 중도로 회수가 장쉐량의 기대완 달리 만주의 경제적 위기를 돕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도 컸다. 오히려 군사적 긴장과 군사비 지출로 봉표의 가치가 폭락했고 국경봉쇄로 중동로 수입도 격감하면서 만주의 재정 위기는 더욱 커졌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상황이 되었으니 장쉐량이 중동로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동로 봉쇄로 인하여 오히려 일본 소유의 만철의 이익만 두둑해져서 장쉐량은 일본 배만 불려주는 뻘짓을 하게 된 것이다. 10월 30일 강방함대의 잔존병력이 전멸당해 10월 31일에 제2 방어선의 중핵인 부금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점령되어 소련군은 송화강을 따라 50킬로미터를 전진했다.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한광제와 양충갑은 장쉐량에게 탄약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를 수령하지 못했다. 이에 여영환이 장쭤샹에게 길림군이 방어하던 동쪽 전선에 파병을 요청했으나 원래 대소온건파였던 장쭤샹은 군대를 동원할 비용이 없다고 이를 거절했다.[* 일부 소스에 따르면 장쭤샹은 길림군 지휘관 정초(丁超)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1월 17일, 소련군은 만저우리 인근의 찰뢰락이 요새를 공격했다. 찰뢰락이를 수비하던 중국군 17여단 소속 7천명의 병력은 대부분 전사하고 여단장 한광제도 전사했다. 이어 15여단이 포위되자 15여단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소련군은 11월 20일 만저우리와 흥안령을 점령했다. 만저우리를 수비하던 사령관 양충갑과 1500명의 동북군이 전사했다. 소련군은 이어 11월 24일 국경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해납이를 함락시켰다. 이로서 방위에 투입된 흑룡강군과 길림군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허나 만저우리와 [[싱안링 산맥|흥안령]]을 비롯한 봉소국경 지대의 요충지를 대거 점령한 소련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고 하얼빈도 내버려두었고 교섭의 예비조건으로 중동로 사건 이전의 원상회복과 관리국장 및 부국장의 권리 부활, 소련인 석방을 요구했다. 11월 26일, 국민정부는 "각국이 조사단을 조직하여 현지에 와서 침략실태를 조사해 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참혹한 패배를 당하게 되면서 봉천군벌 내부의 알력은 극심한 수준에 이르렀다. 길림군이 패배하면서 [[장쭤샹]]이 소련과 내통하여 길림의 지반을 사수하려 하고 있으며 메리니코프에게 기밀을 누설했고 장쭤샹의 소극적 태도와 더불어 장쭤샹의 조카 장입정(張立庭)이 정초의 말을 듣지 않아 패했고 이 때문에 장쉐량이 오만한 태도로 장쭤샹을 냉대했다는 둥의 소문이었다. 일단은 소문이었으나 장쉐량은 대단히 당황하였고 길림군의 폭동을 우려하여 장쭤샹을 경질하지 않고 장쭤샹 공관 부근에 편의대를 파견하여 출입자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12월 3일,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이 중소 양국에 정전을 요청하며 조정에 나설 의사가 있음을 통고했으나 소련은 3국의 중재를 거부하고 직접 교섭에 나설 것을 밝혔다. 이에 미국이 일본에게 공동으로 조정을 나서기를 제안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오히려 주소 일본대사 다나카 도키치는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 [[레프 카라한]]에게 "이번 사건을 그냥 참고 넘어간다면 귀국의 위신이 크게 실추될 것."이라면서 소련의 실력행사를 부추겼고 만철을 이용해서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게 해달라는 장쉐량의 요청도 거절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동북군을 매우 얕잡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경시하던 소련군은 열강의 군대와 동등하다고 간주할 정도로 고평가하게 되었으며[* 물론 일본이 소련군을 진짜로 고평가하게 되는 계기는 [[할힌골 전투]] 이후였다. 할힌골에서 크게 패한 일본은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을 다시는 못 하게 된다.] 이는 훗날의 [[만주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2월 혁명]] 이래로 1차대전과 혁명 여파로 크게 약화된 전투력이 확고하게 재건되었음을 증명한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