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소전쟁 (문단 편집) === 우수리스크 의정서와 하바롭스크 의정서 === 어쨌거나 소련군의 강화 의사에 장쉐량은 11월 26일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화답을 보냈다. 소련군은 장쉐량의 강화 의사를 확인한 후 11월 27일 해납이 점령을 마지막으로 공격을 중단하고 장쉐량의 제의에 동의하였다. 11월 30일 장쉐량은 장쭤샹, 여영환 등과 함께 북룡에서 대소련 문제를 토론, 차이윈성과 이소경을 수분하에 보내 소련과 담판하게 하기로 했다. 12월 1일, 차이윈성과 이소경이 우수리스크에서 소련 전권대표 시마놉스키와 담판하여 여영환의 해임, 중동철도 원상회복의 내용을 담은 우수리스크 예비의정서를 조인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월 5일 장쉐량은 우수리스크 의정서 승인을 외무인민위원회에 통고하고 12월 8일 여영환을 해임, [[모더후이]]를 중동로 이사장에 임명했다. 12월 11일 차이윈성과 시마놉스키가 하바롭스크에서 다시 회담을 진행, 12월 22일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추가적으로 체결하고 바로 효력을 발휘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양국의 전쟁 종식. * 2. 소련군의 만저우리 일대에서의 철군. * 3. 중국은 백계 러시아 군대를 해산하고 그 장령을 추방. * 4. 중동철도는 7월 10일 이전 중소 공동관리 상태로 회복. * 5. 구금된 군민은 피차 석방하고 영사관도 다시 개방하며 상업지구의 영업 재개. * 6. 소련은 정,부국장을 추천. * 7. 1930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정식회의를 개최. 1930년 1월 5일 동부선이 개통되었고 1월 20일부터 서부선이 개통됨으로 중동로는 1929년 7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소련군은 전사자 150명과 부상자 700명을 낸 반면 장쉐량은 1만 5천명의 병력을 잃었다. 장쉐량이 하바롭스크 의정서의 체결을 국민정부에 통고하자 국민정부는 차이윈성의 월권 행위를 지적하였고 외교부장 왕정팅은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인정할 수 없단 입장을 밝혔다. 이에 장쉐량은 예비회의는 정식회의 날짜와 장소 및 이행선결조건의 방법을 상의하는 것이지 결코 중요문제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면서 중앙의 공식외교권을 표면적으로 옹호하자 국민정부는 실질적으로 장쉐량의 교섭을 묵인했고 하바롭스크 의정서는 국제법상의 효력을 발휘하였다. 1930년 1월, 국민정부는 모더후이를 중동로 독판에 임명하여 중소 정식회담 전권대표로 삼았다. 모더후이는 5월부터 모스크바에서 25차례에 걸쳐 중동로 철도 문제와 중소 외교 복교 문제를 논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소 문제는 흐지부지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