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천군벌 (문단 편집) === 북양정부 시절 === ||[[파일:봉천군벌순승왕부회의.jpg|width=100%]]|| || [[직봉풍전쟁]] 당시 순승왕부에서 [[우페이푸]]와 회의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장쭤린과 봉천군벌 장령들[* 1번이 장쭤린, 2번이 장쭝창, 3번이 우페이푸, 4번이 장쉐량이다.] || 시작은 만주의 마적이던 [[장쭤린]]의 비적떼였다. 장쭤린은 [[러일전쟁]], [[신해혁명]] 등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일개 마적단에 불과했던 그의 세력을 봉천군벌이라 불리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시켰고 [[멍언위안]] 등 만주의 경쟁 세력들을 차례로 제압, 만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동맹을 맺고 1차 관내출병을 단행하여 동삼성순열사에 임명되었으며 북양군벌 내부에서 무시할 수 없는 힘의 축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원래 안휘군벌과 동맹관계였던 봉천군벌은 돤치루이의 측근인 [[쉬수정]]의 전횡으로 환계와 단절하고 [[펑궈장]]의 [[직예군벌]]과 동맹하게 되었다. 돤치루이가 쉬수정을 서북주변사 겸 변방군사령관에 임명하여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는 등 동북의 장쭤린에 맞먹는 세력을 구축하려 하자 봉계와 직계는 환계에 대항하는 8성 동맹을 체결하여 환계에 맞섰다. 1920년 3월, [[우페이푸]]의 직군이 호남에서 북상하여 변방군과 대치하자 장쭤린은 대총통 [[쉬스창]]의 요청에 따라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돤치루이의 입장이 완고하여 협상은 결렬되었고 쉬수정이 장쭤린 암살을 시도하면서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서 봉천군벌은 직예군벌과 힘을 합쳐 크게 승리,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직예군벌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22년 봉천군벌은 안휘군벌과 다시 힘을 합쳐 [[1차 직봉전쟁]]을 일으켰으나 마적단 출신이 대부분이라 현대적 군대와 거리가 먼 오합지졸로 구성되어 있던 봉천군벌은 참패했고[* 원로들은 엄정한 기율이나 현대적 군사훈련이 실전에서 병사들을 허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적인 군사 교육 제도를 괄시했지만 1차 직봉전쟁에서 원로들은 패주했고 궈쑹링과 장쉐량 등은 오히려 선전했다.] 장쭤린은 [[궈쑹링]] 등 현대 군사교육을 받은 참모단을 중시하면서 봉천군 현대화에 나섰다. 이후 봉천군벌은 원로들로 구성된 구파, [[양위팅]]을 비롯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관파, 궈쑹링 등의 육대파로 분할되었다. 제1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이 보유한 40대의 항공기의 폭격과 기총사격에 속수무책이던 봉천군은 1923년 9월 4일 동3성 항공처를 설립하고 공군 창설을 추진했다. 봉천 외곽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프랑스에서 대량의 비행기를 구매했다.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우수한 학생 35명을 프랑스 항공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2차 봉직전쟁이 벌어졌을 때 봉천군벌 공군은 3개 비행대와 100여 대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했다. 프랑스제 코드롱-III 전투기와 브레게 19 전투폭격기, 미제 커티스 슈라이크 수상비행기 등의 최신 기체라 직예군이 보유한 구식 전투기들보다 성능이 우월했다. 만주사변 직전에는 5개 비행중대 300여 대의 항공기와 100여 명의 조종사를 보유하는 등 중국 최강의 군벌 공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중국을 재통일한 장제스조차도 이 정도 전력을 손에 넣으려면 1936년은 되어야 했다. ] 양위팅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봉천군벌의 문무겸비의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쭤린의 모사를 맡아 정치와 군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봉천군 훈련총감과 동 3성 병기총감으로서 구미와 일본에서 대량의 무기를 수입하고 1921년 당대 중국 최대의 병공창인 동3성 병공창을 건설했다. 투자금은 3억 위안에 육박했고 면적 60만평, 기계 8,000여대, 기술자 1,200명과 노동자 3만명의 중국 대륙 전체에서 가장 거대함을 자랑했다. 1929년 즈음 연간 생산량은 75mm에서 240mm까지 각종 야포 1,000문과 포탄 20만발, 소총 6만정, 탄약 1억 8,000만발,기관총 1,000여정에 달했다. 이와 별도로 봉천 박격포창이 있어 매월 박격포 80문과 포탄 4만발을 생산했다. 봉천군벌의 군사교육기관으로는 1919년 3월 봉천 교외의 동3성 강무당을 개편해 설립된 동북육군강무당이 있었다. 우수한 교관이 부족하던 초기 장쭤린은 한때 자신이 청조에 반역한다고 죽이려 든 궈쑹링과 관계가 좋지 못했음에도 궈쑹링을 포섭,참모 겸 전술 교관으로 임명해 교육을 맡긴다. 궈쑹링은 베이징 육군대학 등 중국 유수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여러 인재들을 불러들여 교관진을 꾸렸다. 교육기간은 1년,한 기수당 입학 정원은 1920년대 말에는 2,000명이 넘었다. 젊은 생도들은 물론이고 봉천군의 고위 간부들도 군사학 재교육을 거쳤다. 짫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훈련으로 명성이 높아 바오딩육군군관학교,윈난육군강무당과 함께 중국 3대 명문 군사교육기관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봉천군은 궈쑹링의 개혁을 통해 군사개혁을 통해 사단 편제를 없애고 여단 편제로 통일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난립하던 온갖 들쭉날쭉한 부대들이 27개 혼성여단과 5개 기병여단,2개 독립 포병여단, 1개 중포병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전시에는 2개 여단씩 묶어서 1개 사단으로 기동했고,각 여단은 3개 연대(기병여단은 2개 연대)로 구성되었다. 사단은 2개 여단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사단 직속으로 128명 규모의 1개 기병중대와 386명 규모의 수송대대가 있었다.각 연대는 1,134명 규모의 3개 보병대대, 1개 기관총중대,1개 박격포중대(76mm 박격포 36문) , 32명 정원의 1개 통신소대로 편성되었다. 포병여단은 3개 연대 9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며 인원수 1,700명에 75mm 야포 108문을 보유했다. 중포병연대는 105mm 이상의 대구경포 32문을 보유했다. [* 출처는 권성욱의 저서 "중국 군벌전쟁" 3부 25장 ] 1922년에는 블라디스토크를 통해 프랑스제 [[르노 FT-17]] 경전차 12대를 구매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24대를 추가 구매했다. 이 전차들로 1926년 1월 봉천군 제1기병여단 산하에 장갑병 대대를 편성했다. 대대장은 상예창 소교였고 6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장쉐량의 직속부대였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차부대로, 1926년 6월에야 첫번째 전차부대를 편성한 일본보다도 빨랐다.[* 권성욱의 "중국 군벌전쟁" 4부 31장이 출처. ] 1924년에는 장쭤린이 돤치루이, [[펑위샹]]과 연합하여 [[우페이푸]]와 [[차오쿤]]을 축출하고([[2차 직봉전쟁]]) [[북경정변]]을 통해 베이징을 점령, 돤치루이를 임시 집정에 추대하고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환계군벌 [[루융샹]], 왕읍당 등을 축출하고 강남 지역으로 무리하게 세력을 확장하다가 직계의 [[쑨촨팡]] 등이 반발하여 [[손봉전쟁]]을 일으키고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키는 등 위기에 처했다. 1925년 3월 22일 봉천에 독일인 화학자들을 초빙하고 화학 병공창을 설립하는 등 독가스전에도 대비하려는 모습 역시 보여줬다. 허난성에서 우페이푸의 즈리군을 상대할때 항공투하로 독가스탄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인 북벌 전쟁 와중에 옌시산의 산시군벌 계열 군벌인 푸줘이를 상대할 때 500발의 독가스탄을 야포로 발사하는 등 중국 군벌로서는 이례적으로 신무기 도입에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 출처는 권성욱의 저서 "중국 군벌전쟁" 4부 36장 ] 장쭤린은 일단 국민군을 자처하면서 자신을 타도하려는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직계와 연합, [[옌시산]], [[우페이푸]]와 연합하여 [[직봉풍전쟁]]을 통해 펑위샹을 격퇴했다. 하지만 1926년 7월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의 1차 북벌|북벌]]을 선포하고 북상하면서 다시 상황이 급변했다. 북양군벌들은 장쭤린을 중심으로 뭉쳐 장제스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국민혁명군]]은 파죽지세로 하남-산동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했다. 1927년 국민당 내부의 국공갈등이 심각해지면서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국민당의 내분으로 북벌은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공결렬]], [[영한합작]]을 거치면서 국민당은 난징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2차 북벌]]에 나서게 되었고 [[펑위샹]], [[옌시산]]도 여기에 가담했다. [[북양군벌]]들은 장쭤린을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로 추대하여 북양정부의 국가원수로 삼았지만 국민혁명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결국 장쭤린은 보경안민을 주장하는 구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관외로 물러나서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고모토 다이사쿠]]를 비롯한 [[관동군]] 과격파의 음모로 1928년 6월 [[황고둔 사건]]에서 열차 폭파로 암살당하고 만다. 장쭤린 사후, 그의 여섯번째 아들이며 육대파와 구파의 지지를 받던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수장에 올라 자신을 견제하는 [[양위팅]], [[창인화이]]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확고히 했다. 만몽분리를 노리던 [[일본 제국]]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장쉐량에게 보경안민에 힘쓰며 국민당과 협력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의 강압적인 요구와 만주까지 불어온 내셔널리즘 열풍에 장쉐량은 오히려 [[동북역치]]를 선언, 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봉천군벌의 특징 중 하나로 [[해군력]]이 있다. 중국은 [[청일전쟁]] 이후 해군력 회복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고, 신해혁명 이후 군벌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의 해군력은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봉천군벌의 해군력은 그 얼마되지 않는 중국의 해군력 중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물론 시작이 마적떼인 이상 봉천군벌이 처음부터 이런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엔 봉천군벌도 소형 포함 등 명목상의 해상 전력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직복풍전쟁에서 칭다오에 주둔하던 원수더(温樹德)의 발해함대를 손에 넣고 이를 강화하면서 봉천군벌의 해군력은 중국 해군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차지했다. 당시 중국 해군의 규모는 장병 5400여명, 총배수량 42,000톤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 봉천군벌의 해군인 동북해군의 전력은 대소 군함 27척과 장병 3300여명, 총배수량 32,200톤에 달하여 전체의 약 77%를 차지했다. 봉천군벌 해군의 변천사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는 1919년 헤이룽장 독군이던 바오구이청이 베이징 정부 해군부에 요청해 포함 4척을 넘겨받았다. 그 중 3척은 리쑤이,리제,리촨으로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헝제국 군함이었다가 나포된 것이었다. 이 포함들은 러시아 내전 당시 하바롭스크 전투에서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20척의 일본 군함들과 함께 함포사격을 지원하기도 했다. 한달 뒤에는 지린-헤이룽장 강방함대 사령부가 설립되어 쑹화강과 헤이룽강의 경비를 맡았다. 상선 개조 포함을 4척 더 확보하면서 전력은 배수량 2,070톤 포함 8척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베이징 해군부 소속이라 장쭤린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1차 직봉전쟁에서 함포사격을 퍼붓는 직예군의 해군전력에 질린 장쭤린은 강방함내 사령관 왕충원을 회유해 해군전력 확보를 시도했다. 봉급이 열달 밀려버린 강방함대는 베이징과 관계를 끊고 헤이룽장 강방함대로 이름을 바꾸고 동3성 보안사령부에 가담한다. 장쭤린은 1922년 8월 동북 항경처,1923년 1월 동북 항경학교를 건설하는 등 해군 인력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23년 7월에는 2,300톤급의 민간 상선 전하이, 2,000톤급 웨이하이를 구매해 해군 생도들 훈련용 연습함으로 사용하고 전하이의 경우에는 수상기 모함으로 훗날 개조해 실전에 투입했다.[* 중국 최초의 실전을 겪은 수상기 모함이었다. 장제스가 점령한 상하이 폭격에 사용되기도 했다. ] 장쭤린은 일본에서 어뢰정을 수입하고 중국 발해함대를 포섭하는 등 꾸준히 봉천 해군의 전력을 증강했고 1920년대 말에 이르면 방호순양함 3척이 포함된 대소 군함 27척,수병 3,300여명, 배수량 3만 2,200톤의 중국 군벌 최강의 함대를 손에 넣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