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관참시 (문단 편집) == 한국사의 경우 == [[신라]]의 반란자 [[김헌창]]은 [[김헌창의 난]]을 일으켰으나 [[웅진]]성이 포위되고 패색이 짙자 자결하고 부하들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머리와 몸을 베어 따로 묻었지만, 웅진성을 함락한 신라군은 김헌창의 시체를 수색해 모아서 다시 베었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삼국사기]]의 편찬자이자 저명한 유학자였던 [[김부식]]이 1170년 일어난 [[무신정변]] 이후 묘가 파헤쳐진 뒤 부관참시 당했는데, 일전에 인종 때 그와 그의 아들인 [[김돈중]]이 무장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먹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정중부를 위시한 무신들이 김돈중을 처참히 죽인 뒤 그의 아버지인 김부식의 시신마저 묘에서 꺼내 무참히 시신을 토막내버렸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돈중의 행위도 문제였지만 '''그에 따른 김부식의 처사가 더 문제였다.''' 저 때에 정중부는 김돈중에게 욕설을 하며 폭행했는데(그도 그럴게 김돈중이 실수로 태워먹은 것도 아니고 일부러 태워먹었다.) 이에 대해서 김부식은 자기 아들이 한 짓은 언급도 않고 정중부만 처벌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부관참시로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인데 이것은 패왕 [[항우]]에게 결국 왕좌를 넘겨준 초나라 의제를 빗대어 [[세조(조선)|세조]]의 [[계유정난|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난한 것으로, [[연산군]] 4년에 [[유자광]]이 이를 연산군에게 고하는 바람에 일이 터졌다. 결국 [[김일손]], 권오복 같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거열형]]을 당했으며, 김종직 자신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묘가 파헤쳐져 시체는 토막나고 효수되었다.[* 이 때의 분위기가 매우 가관인데 대신들이야 계유정난으로 출세한 이들이 많았기에 모두 극형을 주장하였다 쳐도 대간도 평소대로라면 타성적으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겠지만 이 때만은 그 심각성에 모두 극형을 주장했고 이 중에는 표연말 같은 '''김종직의 제자'''도 있었다. 그나마 일부 대간들은 처벌을 낮춰줄 것을 주장했는데 그들의 논지로 '''찢어죽여도 가당찮지만''' 죽은 사람이니 처벌을 낮춰주세요 정도였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모두 연산군의 명령으로 끌려갔다.] 오늘날이면 몰라도 전근대 시절 김종직의 세조에 대한 공격은 비단 연산군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왕이라도 묵과할 수 없는 왕실 능멸이었다.[* 이런 대형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중종반정 후 사림들은 무오사화의 피해자들마저 억지로 쉴드를 쳐버린다(...) 그러나 사안이 워낙에 심각해서 중종은 다른 요구는 몰라도 이 요구는 들어주면서도 매우 찝찝해했다.] 그 밖에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과 [[생육신]] 중 한사람이었던 남효온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남효온은 생전에 소릉 복위를 줄기차게 주장한 탓에 연산의 눈에 찍혔다. 여기서 소릉은 단종의 친모 현덕왕후 권씨의 능으로 세조가 파헤쳤다.] 또한 세조의 일등 참모였던 [[한명회]]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토막나고 한양 저잣거리에 목이 효수되었다.[* 한명회 외에도 정창손도 부관참시 및 효수되었으며 정인지, 심회는 효수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부관참시는 되었다.] 한편 연산군 때 공조판서로 있었고 《용재총화》의 저자이자 세조의 사람이기도 했던 성현도 세상을 떠난 지 수개월 후 일어난 갑자사화에 시체의 목이 달아났다.[* 이 집안은 아들 성세창마저 불운에 휩싸였다. 성세창은 [[명종(조선)|명종]]시기 [[윤임]] 일파로 몰려 [[윤원형]]의 미움을 사 유배 후 비참하게 죽었다. 정작 성세창은 윤임과 비슷한 김안로와 적이었다.] 그밖에도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이 실록을 뒤져 어머니 윤씨를 폐위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부관참시했다. 특히 연산군이 ‘갑자육간(甲子六奸)’이라고 지목한 권신 이극균(좌의정)·이세좌(예조판서)·윤필상·성준·한치형(이상 영의정)·어세겸(좌의정) 모두 끔찍한 화를 입었다. 이들이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록을 보면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이나 집을 헐어 연못을 만드는 파가저택(破家瀦澤) 등의 형벌도 자행했다고 한다. 1894년 4월 14일 상하이에 있던 [[김옥균]]이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시신이 조선으로 오자 곧바로 부관참시 당했는데, 이는 한국사의 마지막 부관참시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