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동명왕 (문단 편집) == 기타 국가 == 한반도 역사상 [[불교]]가 가장 성했던 [[고려]]시대에 [[밀교(불교)|밀교]] 의례가 퍼짐에 따라 부동명왕을 포함하여 명왕 신앙이 어느 정도 있던 듯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거의 잊혔다.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210호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紺紙銀泥不空羂索紳變眞言經 )은 1275년에 [[고려]] [[충렬왕]]이 발원하여 짙은 남색 종이에 은가루로 사경한 최고급 [[불경]] 유물인데, 13권의 권두에 부동명왕 그림이 있다. [[http://www.bowonsa.or.kr/bbs/board.php?bo_table=07_5&wr_id=60&page=5|#]] [[파일:external/www.cha.go.kr/1611667.jpg|width=500]] 국보 제210호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권두에 그려진 부동명왕 그림 2012년에 [[서울특별시]]기념물 제28호 도봉서원[* 1573년, [[조광조]]를 기리고자 세웠으나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헐린 서원. 지금 있는 서원 건물은 1972년에 재건한 것이다.]에서 [[고려]]시대 금강령[* 손잡이를 금강저 모양으로 만든 작은 종. [[금강저]] 항목 참조.]이 발굴되었는데, 제작 수준이 높거니와 보기 드물게 [[오대존명왕]]도 금강령에 새겨져 있어 주목받았다.[* 이런 [[불교]] 유물이 하필 [[서원]] 자리에서 발굴된 까닭은, 도봉서원 터가 원래 영국사(寧國寺)라는 [[절(불교)|절]]이 있던 자리기 때문이다. 극렬 성리학자 [[조광조]]를 모신 서원 자리가 절 터였다는 점이 얄궂은 일이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22/2014082200145.html?Dep0=twitter|#]] 이런 유물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부동명왕 등 오대존명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조형으로도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전라남도]] [[목포시]]에 있는 [[유달산]](鍮達山) 정상 부근 바위에는 [[일제강점기]], 정확히는 1931년에 [[일본인]]들이 만든 부동명왕, [[구카이|고보(弘法) 대사]][* 774~835. [[헤이안 시대]] 고승이며 일본 [[진언종]]의 개조인 [[구카이]](空海)대사를 가리킨다. 일본 [[밀교(불교)|밀교]]의 시조이며, [[일본인]]들에겐 사후에 조정이 내린 시호인 '고보(弘法) 대사'로 더 유명하다. [[서예]]에 능하여 일본에는 "고보대사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 "고보대사도 붓을 잘못 놀릴 때가 있다." 하는 [[속담]]마저 있다. 고보 대사가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대사에게 보낸 편지는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모두 높아 일본 국보로 지정받았다.] 마애상이 있다. 여기 있는 부동명왕과 고보대사 마애상은 일본 [[시코쿠]][* 고보대사가 [[시코쿠]] [[가가와현]] 출신이기 때문이다.]에 있는 유명한 [[시코쿠 88개소|88 사찰 순례]]를 대신하고자 만든 것이다. 시코쿠 88 사찰 순례는 [[일본어]]로 오헨로(お遍路)라고 불리는데, 일본에서는 대중적인 불교 신심행위로 유명하다.[* [[시코쿠]] 전역에 있는, 고보대사가 창건했거나 중창했다고 전하는 사찰 여든여덟 곳을 순서에 따라 참배한 뒤, 마지막으로 고보대사가 창종한 진언종의 본산 고야산을 참배하여 마무리 짓는다. 진언종에서는 '고보대사는 고야산에서 선정에 들었을 뿐 아직도 살아있다.'고 말하므로, 오헨로는 고보대사의 흔적을 좇아 88사찰을 돌아다닌 뒤 마지막으로 고보대사 본인을 찾아가 인사하는 것으로 끝내는 셈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직접 시코쿠까지 가서 걸어다니며 88개 사찰을 순례하기란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오헨로를 단순화하여 대리 순례를 만들었다. 특정공간 안에 오헨로 88 사찰에서 떠온 흙과 각 사찰에서 본존으로 모시는 불보살의 상 88좌를 순서에 맞게 배열하고, 마지막으로 고보대사의 상을 안치하여 고야산 참배까지 대체하도록 하는데, 이를 일본어로 오스나후미(お砂踏み)라고 부른다. [[유달산]]에 있는 부동명왕과 고보대사 마애상도 오스나후미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목포]]에 사는 일본인들이 직접 일본 [[시코쿠]]까지 가지 않아도 침배할 수 있도록, 유달산 등산로를 따라 오헨로의 각 사찰에서 떠온 흙과 불상 88좌를 안치하여, 유달산을 오르면서 88좌 불상을 참배하고 정상에서 고보대사상을 참배하도록 하였다. 고보대사상 옆에 부동명왕상을 새긴 이유는, 고보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던 길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부동명왕이 도와주었다는 전설 때문이다. [[광복]]에 따라 [[히키아게샤|일본인들이 귀국]]한 후 일본인들이 유달산에 만든 불상을 파괴하거나 다른 곳으로 치웠기 때문에, 바위에 새긴 고보대사와 부동명왕의 마애상만 남았다.[* 사실 이 마애상도 [[광복]] 이후 파괴하려고 했는데, 일꾼이 부수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가 "이걸 부수면 화를 입을 것 같다." 하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도 더 손대지 않고 내두었다.] 유달산 마애상처럼 국내에 있는 부동명왕 조형물은 [[일제강점기]] 유물인 경우가 꽤 있다. 당연히 한국에서 부동명왕의 인지도는 낮다. 한국에서 부동명왕 신앙은 [[창가학회]][* 창가학회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창가학회의 신앙의 대상은 오직 묘법연화경에 귀의(남묘호렌게쿄) 뿐이다. 나머지 불, 보살, 신 등은 어디까지나 묘법연화경에 귀의한 법화경 행자를 지키는 존재인 제천선신의 역할을 할 뿐이다.], [[일련정종]] 등 일본계 불교 종파를 믿는 극소수 사람들 사이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밀교(불교)|밀교]]가 가장 온전히 남은 [[티베트 불교]]에서는, 그냥 경전에서만 언급될 뿐 실제 신앙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파일:external/blogimg.goo.ne.jp/dbccd72162d48654a15d5cf7e059ca8f.jpg]] 부동명왕의 인기가 이처럼 일본에서 유독 높았기에 [[일본]]에는 조각이나 그림으로 많이 묘사하였다. 그 중에는 참으로 형상이 무시무시한 것들도 있다. 보통 업화와 같은 불길이 온 몸을 두른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가루라염'이라는, [[가루다]]가 뿜는 불꽃이라고 한단다. 왼쪽 입술이 윗 입술을 물고 오른쪽은 무섭게 찡그리며, 오른 눈은 위를, 왼 눈은 아래를 노려본다. 진짜 불은 아니고 모든 부정을 태워 없앤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검의 이름은 [[쿠리카라|구리가라검]](俱利伽羅劍)이다. 그냥 닥치고 파괴신 기믹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