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동항 (문단 편집) == [[러시아]]와 부동항 == 북극권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러시아]]'''는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쳐 왔다. 표트르 대제 즉위 초기, 러시아가 운영하는 대규모 무역항은 [[북극해]]의 일부인 [[백해]]에 있는 [[아르한겔스크]] 한 곳 뿐이었고 이런 아르한겔스크조차 1년에 고작 3개월만 가동이 가능한 곳이어서 러시아의 해상 무역은 대단히 제한적이었고 타국과의 교류, 무역 분야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크게 뒤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의 팽창 정책과 예카테리나 2세의 남진 정책이 성공해 러시아가 [[발트 해]]의 [[리가]]와 [[흑해]] 북안의 [[오데사]]를 비롯한 항구들을 차지한 뒤, 곡물과 원자재 수출로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었던 점과 표트르 대제 이후부터 시작한 러시아 해군의 성장 과정과 위상 변화를 생각하면, 부동항의 중요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팽창했다는 것은 낭설이다. 부동항을 얻기 위해 추진했다고 알려진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과 아메리카 개척은 결과적으로 [[러시아령 다롄|포르트 아르투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얻긴 했지만 일차적으로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사업이고, 진출 과정도 모피를 제공하는 담비와 해달의 서식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중앙아시아로의 진출도 부동항 때문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과 그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함이었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해서 아프간과 이란, 인도로 진출하려 했다. 아시아로의 진출 또한, 부동항 때문이 아니라 대중 무역과 중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은 유럽의 강대국들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한 완충지대를 보유하기 위함이었다. 드넓은 북유럽 평원은 국경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천혜의 자연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분쟁이 발생한 흑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차 대전 개전 직전, 유능한 재무 장관인 표트르 바크가 니콜라이 2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제정 러시아의 대외 무역은 육로 무역이 중심이고 해상 무역은 수출보다는 수입의 비중이 더 높아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확보해 흑해를 완전히 내해로 만들지 않고서는 흑해의 부동항들도 그렇게 큰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러시아가 부동항에 집착한다는 역사 왜곡이 퍼진 것은 영국 때문이다.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팽창이 인도와 지중해에 대한 영국의 패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 역지사지를 시도해본다고 러시아가 팽창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계산해보았으나 해양국가인 자신들의 관점을 그대로 대입하는 바람에 러시아도 바다로 나오고 싶겠지 -> 바다로 나오려면 부동항이 필요하겠지 -> 부동항이 필요하니까 팽창하겠지? 로 이어지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영국과 국토를 확장하려는 러시아 사이의 갈등과 충돌은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르며 1813년부터 1907년까지 무려 94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 영, 러 양국 간의 그레이트 게임은 21세기 현재의 국제 정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