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라쿠민 (문단 편집) == 역사 ==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천민 계급의 기원은 확실한 것이 없다. 이것은 근대 일본이 [[군국주의]]화 되면서 야마토 사상을 꺼내들었던 것의 여파라고 추정되는데, 당시의 일본은 [[아이누]]를 비롯해서 일본 인근 지역을 '사실은 전부 일본 땅'이라는 대일본주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이들과 이들의 토지를 흡수하면서 '일본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소수 집단의 역사를 부인하고 일체화했기 때문이다.[* [[막부]] 시대를 열고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쇼군]]도 [[헤이안 시대]] 때까지는 [[아이누]]( 동북쪽의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선발되었다는 의미의 '[[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에서 온 말이다. 한자를 해석하자면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 그러나 율령제가 붕괴되고 나서는 군벌화되었고, 가마쿠라 막부기 때부터 에도 막부기 때까지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고, 이에 따른 연구의 진보는 미미한 상태. 천민 계층의 기원 시점은 근대, 중세, 고대로 나뉘어지며 근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기간이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중세는 11세기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 [[에도 시대]]에는 천민 계급을 에타(穢多, 예다)[* [[불교]]와 [[신토]]에서 말하는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 특히 [[신토]]에서 [[피]]나 [[죽음]]에 관련된 일을 매우 부정하게 보았다.], 히닌(非人, 비인)[* [[불교]] 용어로 ''''[[인간]]의 형상을 하였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를 뜻한다. 원래는 둔갑술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야차]]나 [[용]] 등을 가리켰다.]이라고 불렸다. 에타는 혈통으로 결정되거나 터부시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사실상 혈통으로 직업이 정해졌기 때문에 혈통으로 한정해도 무방하다. 히닌은 [[한센병]] 환자, 걸인, 연공을 바치지 못한 평민이나 부락으로 도망친 범죄자 등을 뜻했다. 에타는 혈통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계속 천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히닌은 원래부터 일반 평민이었기 때문에 신분 보증인(주로 고용인)이나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신분을 복권시켜 주기도 하였다. 에타는 상술했듯 피와 죽음에 관련된 일을 주로 맡았고 [[소]]나 [[말]]의 사체 처리, 도축업[* [[일본사 관련 정보|일본의 역사]]에서는 식육 금지령이 자주 내려졌지만 해금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피혁 가공, 장의사, 도로 청소, 폐기물 처분 등을 맡았다. 특히 [[출산]] 시 배출되는 [[태반]]을 에나(胎衣, 태의)라 불렀는데, 이 [[태반]]은 정해진 방법으로 절차[* 이 절차를 에나오사메(胎衣納め)라고 부른다. 산후 5일 혹은 7일 후에 [[대야]]나 [[항아리]]에 담아 길일과 태어난 아이의 생년월일로 길한 방향을 찾아 묻는 의식이다.]를 치루어 처분하지 않으면 [[신토]]의 가치관에 따르면 [[피]]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나 그 가족에게 '더러움'이 남아 큰 재앙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그 태반을 처리하는 일도 에타가 아니면 맡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타는 '더러움'을 정화하는 전문가로서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구성원[* 심지어는 각 [[마을]]에 배치하기도 했다.]이었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갑옷]] 등에 사용되는 [[가죽]]의 수요가 급증해 고도 전문 기술자로 다른 영지[* 특히 [[서일본]] 지방에서 많이 불러왔다.]에서 [[스카우트]]를 해오기도 하는 등 일반 농민보다 우대 받는 경우가 많았다. 히닌은 에타와 같은 일[* 지역마다 다르나 [[피]]나 [[죽음]]에 관련된 일보다 토목 공사, 청소나 폐기물 처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을 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주로 [[걸인]]들이 많았는데, [[걸인]]의 조직화도 이루어져 [[한센병|나병]] 환자나 [[고아]], [[장애인]] 등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이외엔 처형 집행보조[* 처형은 주로 에타가 행했다.], 큰 사찰이나 고위 귀족의 영지에서의 야간 [[순찰]]과 [[잡무]][*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을 산죠(散所, 산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착하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떠돌이 [[승려]]로 [[기도]]를 하고 [[시주]]를 받거나[* 이런 이들을 쇼몬지(声聞師, 성문사)라고 불렀다.] [[노래]]나 [[춤]] 등을 피로하는 예능인[* 특히 고위 귀족의 연회에 남장을 하고 가무를 선보인 시로뵤시(白拍子, 백박자)가 많았다. 이 가무는 원래 신에게 바치는 가무였다.], [[유녀]], 심지어 천황의 [[왕릉|황릉]]을 지키고 천황릉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히닌도 있었다.[* 이들은 료코(陵戸, 능호)라고 불리며 에타/히닌 중에서도 여러 가지 면세 혜택을 받는 등의 엄청난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히닌들과는 다르게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과 혼인을 해야만 했다.] 에타의 탄생도 일본이 여러 국가나 부족 등으로 쪼개져 전쟁을 하던 시기에 정복 당한 세력이 그 바탕이라는 설도 있고, 외국에서 표류해 온 무리를 노예로 삼은 것이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赤松啓介, 1909~2000)의 연구에 의하면 적어도 [[센고쿠 시대]]에는 이미 에타 내지는 그에 준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한다. [[나라 시대]]에는 한자의 표기가 '恵多'로 다르지만 에타가 처음으로 언급되며 이 외에도 [[매]]의 [[먹이]]를 주는 일로 餌取/恵止利(에토리) [[헤이조쿄]]의 고분군 근처에는 에타 부락이 다수 존재한다. 지금의 '穢多' 표기가 시작된 건 [[헤이안 시대]]부터였으며 그 시절까지는 큰 차별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 암암리에 차별은 있었지만 이후 [[에도 시대]]부터 본격적인 차별이 시작되었다. 에타나 히닌의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천한 일이라 해도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 [[점조직]]화 되어 그들만의 삶을 살아왔다. 에타가시라/히닌가시라(주로 [[서일본]] 지역의 명칭), 혹은 탄자에몬([[동일본]] 지역의 명칭)이라고 불리는 부라쿠민의 두령급은 [[가죽]]의 [[전매#s-2]] 권한을 얻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대략 10만석의 [[영지]]를 갖고 있는 [[다이묘]] 수준의 경제력과 격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재력으로 [[대부업]] 또한 종사했다. 특히 [[동일본]]의 탄자에몬은 '탄자에몬야시키'라고 하는 거대한 [[저택]]까지 갖고 있었다. [[에도 시대]]부터 조정은 지배 계급인 [[무사(역사)|무사]] 층에 불만이 몰리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계급간의 불화(차별)를 부추겼다. 그렇게 차별 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피차별 부락,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피차별부락민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부라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구 천민 계급만이 부라쿠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피차별 부락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을 부라쿠민이라고 부르는데, 에타나 히닌의 집단 거주 지역 이외에도 전쟁 포로·전염병 보균자·옛 [[에조]]·[[하야토]]·[[구마소]] 등의 집단 거주 지역이 피차별 부락으로 분류되었다. 부락 내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 부락 밖으로 나가거나, 부락 밖에서 빈곤한 사람이 생활비가 싼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계속 있었고 [[시즈오카현]]에서는 민간 [[음양사]]가 메이지 초기 음양사 폐지령 이후 실직하여 빈곤으로 인해 피차별민으로 간주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그 외에도 부락 밖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신분 계급을 없애면서 이들을 모두 평민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타 출신 평민들을 '신(新) 평민'이라고 부르며 여전히 차별하였다. 메이지 시대가 [[화족]] 등의 소수의 사회 고위 계층에 이끌려갔던 시대였던 만큼 결코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1884년 [[도쿄대학]]에 인류학회가 생기면서 부라쿠민의 기원 등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관지를 보면 신분제가 철폐되었음에도 당당하게 에타라는 멸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 연구 중에는 심지어 '안구가 빨갛고 고기를 먹기 때문에 조선인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황당한 내용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籐井乾助, 「獲多は他国人なる可し」, 『東京人類学会報告』, 第10号, 1886年 12月. 원래 일본에는 육류 음식이 없었다. 675년 [[덴무 덴노]]가 금육령을 제정한 이래 약 1,200년간 육식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의 신장을 개선하고자 정부 차원에서 1871년 금육령을 해제했으나 실제로 대중들 사이에 육식 문화가 퍼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190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서양 음식과 함께 육류 문화가 조금씩 퍼지는 정도였다. 이때부터 화식(和食)과 양식이 섞이는 화양절충도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그러나 금육령 기간에도 고기를 먹을 사람은 먹었기 때문에 음성적으로는 남아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이만큼이나 진보했는데, '저런 미천한 자들이 일본인일 리가 없다!'는[* '일본의 어두운 면이나 사건사고는 전부 재일 외국인들이 일으키는 것이고 순수한 일본인은 무결하다'는 [[기적의 논리]]는 일본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선민사상]]에서 나온 주장. 1908년에는 전국적인 지방 개선 운동을 시행하며 [[미에현]]에서는 부락 개선 정책도 같이 시행되는데, 이것은 차별 대책이 아닌 치안 대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빈곤층에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당시 미에현 빈곤층의 대부분은 부라쿠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에타의 타 인종 도래 기원설을 반영하여 도쿠슈부라쿠(特殊部落^^특수부락^^ 혹은 特種部落^^특종부락^^)라고도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부락민들에 대한 처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2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일본 사회의 기준으로 문제되는 일부만 솎아내고 국가시스템은 그대로 이어간 것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실 일본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기는 했으나]], [[한국]]처럼 [[6.25 전쟁|나라의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쑥대밭]]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몰락 작전|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실행 직전에 일본이 원폭을 맞고 바로 항복한 덕분에 기존부터 이어져오던 국가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차별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던 건 아니다. 1922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수평사(水平社)가 등장하여 부라쿠민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발표된 수평사 창립 선언문은 일본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수평사는 이후 여러 조직으로 갈라져 버렸고, 완전한 해방을 달성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