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림사건 (문단 편집) == 왜 일어난 사건인가? == [[박정희]] 사후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은 집권 과정에서 명분이나 정통성이 전혀 없었다. 박정희 역시 [[쿠데타]]로 집권했으나 당시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대한민국은 경제력마저 북한에 뒤졌기 때문에 전쟁의 재발 가능성에 전 국민이 불안에 떨었으며 [[4.19 혁명]] 이후 집권한 [[윤보선]], [[장면]] 등의 지리멸렬한 내분은 국민들에게 실망과 불안감을 더 안겨주었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이후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자기 마음대로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통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제대로 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진행하였다. 이것이 [[제5대 대통령 선거]]로 이 선거에선 정권을 장악한 [[민주공화당]]의 금권, 관권 선거 공세가 있긴 했지만 선거 운동을 어쨌든 제대로 했고 자신이 [[빨갱이]]라는 윤보선의 공격에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박정희가 호남에서도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14만표차라는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후 역시 여당에 유리한 구도를 유도하긴 했지만 [[제6대 국회의원 선거]]도 정상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도 겨우 34% 정도의 지지만 받았지만 야권의 분열로 결국 대승했다. 박정희는 분명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이후 국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주었고 거기서 승리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쿠데타를 비난하던 야권의 거물들도 당시 기준으로는 부정을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의 부정부패, 금권, 막걸리 선거는 여야 모두의 문제였고 실제로 [[자유당]] 시절의 선거에서 이런 행위는 더욱 극심했다. 애초에 [[이승만]]은 아예 선거를 하지 않으려고 [[진보당 사건|상대를 죽인]] 인물인데 그에 비하면 박정희는 양반인 셈.] 선거와 발언의 기회를 보장하는 박정희가 민의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치의 과정을 보자면 박정희는 독재자였지만 정치적 감각과 통치술은 대단했다. 거기에 그의 기반인 [[대한민국 국군]]은 당시에는 매우 젊고 유능한 인재가 가장 많이 모인 집단으로 아직은 부패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기존 정치인들보다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은 5공 시절보다 훨씬 능력 있는 엘리트들로 가득 채워졌다. 또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독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유신 헌법]] 제정 이후이며 이전까지는 교묘한 술책을 사용했을지언정 선거를 제대로 진행하여 국민들로부터 확실하게 정통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당시 상황을 알고자 한다면 [[5.16 군사정변/반응|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하지만 [[전두환]]은 집권 배경과 과정이 박정희와 판이하게 달랐다. 전두환의 전임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대통령 유고 관련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시작하여 업무를 시작한 지 겨우 40여일에 불과했다. 애초에 최규하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초반에 쿠데타에 대해 정국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고 사과하며 만약 국민이 반대한다면 기꺼이 물러나겠다고 연이어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제안한 박정희와 다르게 전두환은 최규하를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국민들의 민주화와 유신 헌법 폐기 및 대통령 직접 선거 요구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음날 [[광주광역시|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학살|학살]]을 저질렀으며 그해 아무런 법적 정당성도 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를 이용해 말뿐인 간접선거인 [[체육관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 헌법으로 종신 독재자가 된 박정희가 사망한 만큼 박정희가 했던 대로 최소한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짓밟은 것.[* 이미 경제 성장의 성과가 어느 정도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1960년대보다 여유로워진 경제로 인해 정치적 민주화에 슬슬 눈을 뜨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 세력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상당히 원시적이면서도 허술하게 대응한 점이 훨씬 컸다. 또 쿠데타에 대한 사과와 쿠데타를 일으킨 근거를 제시함과 동시에 선거를 제안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정통성과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을 우선적으로 거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애당초 정통성이 전혀 없었고 정통성을 확보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한미 미사일 사거리 협정을 통해 미국의 지지를 받아냈을 뿐이었다. 똑같이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얻었지만 전두환의 정치적 감각과 통치력은 박정희에 훨씬 못 미쳤다. 그 결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자리를 유지했고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거기에 박정희 시절 [[대한민국 육군]]이 아직 부패하지 않은 젊고 유능한 장교들의 조직이었다면[* 당시 대한민국은 가혹한 식민통치와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최악의 후진국이었다. 근대적인 산업 기반 따위는 전무한 농촌 국가였기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은 관료 아니면 군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미군이 직접 훈련시킨 육군 장교단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선진 문물을 가장 많이 접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소위 1960~70년대의 공업화를 군부와 (미국 유학파) 관료들이 주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1980년 전두환이 이끌던 군부는 이미 20년이나 집권하면서 썩을 대로 썩은 기득권 집단에 불과했다.[* 애당초 [[하나회]]와 같이 군부에 특정 파벌이 자리잡고 권력 나눠먹기를 하던 시점에서 이미 군부가 타락할 대로 타락한 것이다. [[일본군]]이 왜 미쳐돌아가기 시작했고 어째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주만 공습|미국에게 선빵을 때리는 무모한 짓]]을 감행했는지 생각해 보면 이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결국 쿠데타라는 같은 방법으로 집권했어도 박정희는 최소한 절차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 이후에도 국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고속 경제 성장을 일구어내 정통성을 일부 획득했지만 전두환은 정통성이 없어 직접 선거로는 아무리 공포 분위기를 조장해도 참패할 게 뻔했다. 결국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정치적 불안 상황을 조장하고,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억지로 긁어내기 위해 강하게 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이 사건 역시 그런 차원에서 조작된 사건이다. 전두환이 그나마 국민들에게 미움을 덜 받게 된 것은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라는 [[북한]]의 [[테러]]로 수많은 인원이 사망하여 북한에 대한 국가적인 분노가 일어나서부터다. 운 좋게 살아남은 전두환은 극단으로 치닫은 군부를 통제하는 것은 그런대로 잘했고[* 사실 군부 핵심 인사를 하나회가 모두 장악한 상황이었고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을 미국이 살살 달래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이마저도 하나회의 수장이라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후 당시의 세계 경제 호황 속에 한국 경제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비난이 점차 사그라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