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마민주항쟁 (문단 편집) === 부산에서의 전개 === ||<|3> [[파일:attachment/03174755_20060415.jpg|width=100%]] || [[파일:부산대학교 시위.jpg|width=100%]] || || 부산대학교 교정에서의 시위 || || [[파일:부산지역 계엄령.jpg|width=100%]] || || 무리 지어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 || 계엄포고문을 보고 있는 시민들[* 계엄사령관이 [[박찬긍]]이다.] || >[[대학생|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대한민국|조국]]은 [[박정희|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유신헌법|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YH 사건|일련의]]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사태]]를 돌이켜보게나... (중략)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박정희|개인]]의 무모한 [[독재|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 있는가... (중략)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 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중략) >모든 [[부산대학교|효원인]]들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뿌려진 「선언문」[*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1988, p32~33.] 이런 상황 가운데 평소 [[데모]] 안 하기로 유명하였던 [[부산대학교]][* 이에 관한 재미난 [[카더라 통신]] 일화가 있다. 당시 [[부산대학교]] 내에서 시위 분위기가 조성되었음에도 시위가 벌어지지 않자 [[이화여대]]에서 뭔가를 부쳐왔는데, 여대에서 보낸 물건이라며 한껏 기대감에 들떠 포장을 뜯어보니 [[고추]]와 [[가위]]가 들어있었다(='''니들 남자 맞냐? 차라리 거기 자르지?''')고 한다. 이에 어이를 상실한 부산대가 발끈하여(...)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설일 뿐이라 확실하진 않다. 애초에 이런 이대 관련 설은 부산대 뿐만 아니라 [[서울대]], [[고려대학교|고대]], [[연세대학교|연대]]에 보냈다 등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고 한다. 게다가 시대 상황까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6.3 항쟁]], 3선 개헌 반대 투쟁, 유신 반대, 부마항쟁, [[5.3 인천민주항쟁]] 등. 또한 시위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위 주최 측에서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조직이 재건되고 부마항쟁을 기점으로 다시 강성 시위를 시작하자 그 성질 어디 안 가고 부산을 [[전포동|전두환도 포기한 동네]]라고 불리게 만들어 버렸다.]에서 시위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 시작은 항쟁 하루 전인 10월 15일이었다. 이날 공대생 이진걸이 '민주선언문'을, 법대생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각각 뿌리면서 오전 10시에 도서관에 모일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되도록 학생들이 모이지 않자 주동자들은 실패한 것으로 단정하고 해산하였고, 정작 10시 40분쯤 되어서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은 주동자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흐지부지 해산하고야 말았다. 이에 큰 좌절감이 교정을 휩쓸었으나 그럼에도 교내의 각 동아리와 학생들은 시위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이중 상대생 정광민이 나서서 '선언문'을 작성하고 16일 인문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뿌리며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고 선동하였다. 이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호응하였다. 정광민이 인솔하는 시위대는 도서관 앞에 이르자 수백 명으로 불어났고 곧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직원들이 시위대를 말리려고 했지만 시위대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2,000여 명 정도로 불어난 시위대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에 교문으로 나아가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전경은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했는데 여기에 분노하여 교내의 다른 학생들까지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전 11시경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은[* 현재 [[부산대학교]]의 총 재학생 수가 1만 8천 명가량이다. 당시는 그 수가 더 적었고, 암묵적으로 여학생들의 참여는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었으며(사실 남자들도 죽어나가는 시위에서 태생적으로 신체 조건이 떨어지는 여자가 버티긴 힘들기는 하지만) 지방 거점 국립대의 특성상 여학생의 수가 적지도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그냥 전교생을 동원한 셈이다.] 세 갈래로 나뉘어 각각 대학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진압부대를 격파하여 마침내 시내로 진출하였다. 학생들은 일제히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부산)|남포동]]과 [[부산광역시청|부산시청]][* 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 와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 이 와중에 경찰의 방어선은 무너지기만 했다. 처음 경찰은 교문에 제1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수천 명의 학생들에 의해 무너졌고, 서면의 제2방어선과 부산역의 제3방어선도 무용지물이었다. 부산역에서 경찰은 버스를 타고 온 학생들을 연행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을 태운 차량들은 많아지기만 했다. 그러자 결국에는 학생들을 잡아가기는커녕 그냥 통과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3시부터는 부산대 학생들의 소식을 들은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에서 게릴라식으로 전개되었다. 바둑판 같은 골목길에 수십 명 단위로 시위대가 돌아다니자 경찰들은 당황했다. 시위대 한 무리를 해산시키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위대가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여기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해주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이나 [[김밥]], 청량음료, 캔맥주 같은 먹을거리와 담배[* 당시에 담배는 평범한 기호품 중에 하나였다. 90년대부터 각종 금연정책과 담배로 인해 생기는 질병에 대한 홍보 그리고 흡연자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담배의 이미지가 안 좋아졌다.],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퇴근 시간에 가까운 오후 6시부터는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시위를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시민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을 외치며 부산 시내를 쏘다녔다. 밤이 깊을수록 시위는 민중의 격렬한 저항으로 바뀌어갔다. 시위대는 새벽까지 부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파출소마다 공격하여 남포, 부평, 보수, 중앙 등 총 11곳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파출소마다 걸려 있던 박정희 사진도 철거되어 태워졌다. 시위대는 이를 보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으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10월 17일, 이날부터 부산대는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부산대 교정에서 다시금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다가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이 되자 전날과 똑같은 양상으로 시위가 펼쳐졌다. 어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듯 경찰은 최루탄과 곤봉을 마구잡이로 썼지만, 시위대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날의 시위로 중구, 서구, 동구 지역 내의 거의 모든 파출소,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 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언론사[* [[KBS부산방송총국|KBS]], [[부산문화방송|MBC]], [[부산일보]]사]와 [[경상남도청|경남도청]][* 현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이때는 아직 창원이 마산시 출장소 관할이었고 도청의 이전 도시가 정해지기 전이다.]도 공격당했고, [[동양방송|TBC]]-TV[* 현 [[JTBC]]의 전신]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시위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였다. 한편 당시 부산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총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