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산포왜성 (문단 편집) == 역사 ==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반도]]에 1차적으로 지은 [[왜성(건축)|왜성]]들 가운데 하나로,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왜군의 총사령부, 구심점이자 최후의 보루로서 기능했던 성'''이다. 본래 이 지역은 부산진성(釜山鎭城)[* 조선 초기부터 왜란까지의 부산진성은 현재 일신기독교병원 주변을 감싸는 방형의 작은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후기의 성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약간 개축하여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진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 [[정발|정발(鄭撥)]] 장군이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진 전투|해당 문서]] 참조.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몇 달 되지도 않은 1592년 9월 1일에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는 이미 부산포왜성의 존재가 드러난다. >'''咸聚釜山城內 官舍盡數撤去 築土造家己所巢穴多 至百餘戶 城外東西山麓 閭閣櫛比 連穡接屋 亦幾三百餘戶 皆是倭人 自作之家 其中大含層階 粉壁有若佛寺 原其所爲痛憤''' > >부산진성 안을 취하여 관아를 모두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다져 지은 집이 많아 일백 호에 이르렀습니다. > >성 밖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 조선 전기 부산진성 터로 추정되는 정공단(鄭公壇)의 동쪽에 자성대가, 서쪽에 증산이 존재한다.]에 집이 즐비한데 담장[* 穡은 墻의 오기(誤記)로 보인다.]을 이어 접한 가옥 또한 3백여 호입니다. > >모두 왜인(倭人)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층계 위에 들어선 것[* 아마도 천수(天守)를 말하는 듯하다.]은 벽에 분을 발랐고 마치 불당 같았습니다. > >그곳을 보니 통분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1592년 4월 옛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축성을 시작하여 불과 약 4개월 만에 기본만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웅천왜성(熊川倭城) 역시 축성에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 쪽 기록을 보면 축조는 1593년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1만여 명인 왜군과 배 400여 척이 상시 주둔하였다고 하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주둔한 적도 있다고 한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10월 15일 다섯 다이로(大老)는 [[구로다 나가마사|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앞으로 명령서를 보내 '울산이 공격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10월 27일, 다섯 다이로 중 하나이자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구로다에게 명령서를 내려 [[가토 기요마사|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협의 하에 [[서생포왜성]]에서 부산포왜성으로 퇴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 [[가토 기요마사|가토]]와 [[구로다 나가마사|구로다]]는 부산포왜성을 소각(燒却)하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왜란이 끝난 후 현재 [[좌천동]]에 있던 부산포동첨절제사영(釜山浦同僉節制使營)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에 다시 설치된다. 그리고 본래 부산포왜성의 본성이었던 증산(甑山)의 성곽은 버려지게 된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인들 자기들 조상이 쌓은 것이니만큼 증산왜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었고, 이는 [[8.15 광복|해방]] 이후에도 큰 문제 의식 없이 유지됐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35호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1969년 8월 1일 '보존가치가 없다.'는 사유로 사적 지정이 해제됐다. 그 이후 문화재 등급을 부여받지 못하고 별다른 보존 조치 없이 대체로 방치되어 오다가, 현재는 산노마루 부분까지가 증산공원(甑山公園)이 되었다. 가장 아래의 [[일본의 성/구루와|곡륜(曲輪)]] 위에는 좌천시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파일:釜山古基.jpg|width=100%]] || 부산포왜성을 쌓은 산의 모습이 마치 떡시루나 솥뚜껑같이 생겼다고 하여 증산(甑山),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이곳의 포구 이름은 부산포(富山浦)였다. 왜란 직전 부산포(釜山浦)로 바뀌기 때문에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와전의 역사가 짧지 않은지, 1872년 군현지도에도 증산왜성이 '''부산고기(釜山故基)'''로 표기되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부산(富山)이라는 이름이 [[고려|고려시대]]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부산 [[부곡|부곡(部曲)]]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