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여자신 (문단 편집) == 생애 == 660년,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당시 관등은 달솔이었다. 백제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혹은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각각 [[웅진성]], [[주류성]]으로 비정된다. 다만 백제부흥군이 [[웅진성]], [[사비성]] 탈환에 실패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웅진성 ''''부근''''에서 활동했다고 봐야할 듯.]에서 거병했다. 백제의 패잔병들을 규합하고, 신라군을 격파하여 백제 사람들은 그를 귀실복신과 함께 '좌평(佐平)'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패퇴하자, 동년 9월 24일에 부여자신은 일본 수군과 함께 탈출해 궁례성[* 지명 미상. 다만 여기서 출발해 일본으로 망명한 점을 미뤄보면 백제 서남해안 지역 중 어딘가로 추정된다.]에 이르렀다. 이후 다음날인 9월 25일에 출발하여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과 함께 일본 열도로 망명했다. 669년, 부여자신은 귀실집사 등 백제 유민 700명과 함께 일본 칸자키군(神崎郡)의 서남쪽에 옮겨 살게 되었다. 671년 정월, 사택소명(沙宅紹明)과 함께 종4위 대금하(大錦下)의 관직을 제수받고 법관대보로 임명되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타카노노 미야츠코(高野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右京 諸蕃 百濟 高野 造 百濟國人佐平'''余自信'''之後也. 타카노노 니이가사와 '우지(氏)'는 '타카노(高野)'로 같은데 '카바네(姓)'가 '미야츠코(造)'로 다르다. 니이가사 가문의 경우 카바네가 '아손(朝臣)'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