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여풍 (문단 편집) === [[백제부흥운동]] ===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항복으로 멸망했으나 웅진성~사비성 주변의 수도권[* 지금의 [[충청남도]] 일대.]만 나당연합군에게 기습적으로 점령당했고, 지방 영토의 대부분과 지방군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이 붙잡힌 660년이 아니라 풍왕의 통치가 끝나는 663년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설도 있다.] 백제의 변방에서는 [[귀실복신]]과 [[흑치상지]], [[지수신]], [[사타상여]], 승려 [[도침]] 등이 임존성[*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추정.]과 [[주류성]][*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추정.]을 근거지로 세력을 넓히며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의자왕과 대부분의 왕자들이 당에 끌려가 왕위가 비어 있었으므로 당시 31년간 [[왜국]]에서 질자로 지내고 있었던[* "부여풍은 왜국에서 인질로 지내고 있는 자이다(扶餘豊, 甞質於倭國者)." 이것은 《[[삼국사기]]》의 표현이다. 《[[일본서기]]》에도 조메이(舒明) 덴노 3년에 풍이 인질로 보내졌다고 나오긴 한다. 부여풍의 경우에는 선례와 다르게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교차검증으로 인질이라고 확인되고 있다.] 왕자 부여풍을 백제로 보내달라고 660년 10월 왜국측에 사신을 보내 요청했다. 이에 부여풍은 동생(혹은 아들?) [[부여선광]][* 부여선광은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어(쿠다라노 코니키시 요시미츠) ''''황족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을 왜국에 남겨두고 1년이 지난 661년 9월 옛 백제 땅에 귀국했다.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bwi1cKeHN1sqk8veo4_1280.png]] 660년 8월, 전격적으로 봉기한 백제 부흥군은 순식간에 200여 개의 성을 탈환[* 애초에 백제 지방군은 의자왕이 항복을 하건, 백제가 멸망을 하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여풍을 왕위에 올리는 과정에서야 합세했다는 견해도 많다. 지방 귀족 세력의 병력 합류가 기록으로 나오지 않은 백제의 멸망 과정을 보면 심히 설득력이 있다.]하며 [[당나라|당]]군을 몰아냈다. 당군은 13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상륙하여 일거에 백제의 웅진성과 수도 사비성을 점령했지만, 잔당 처리에는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벌써 대부분 병력이 본국으로 귀환한 상황이었다.[* 굉장히 묘하게도 1400여 년 후 [[이라크 전쟁]]의 상황과도 매우 흡사하다. 빠르게 주요 지도부를 포함한 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자 주요 전투 병력 대부분이 철군하고, 남아있던 잔병들이 저항 세력을 형성하여 게릴라전을 포함한 비정규전이 벌어지는 향상이었다.][* 사실 이는 [[참수작전]]의 양날의 검과 같은데 빠른 전쟁 종결을 가져온다는 이점은 있으나 지방군이 건재하여 이들을 회유하지 않아 저항세력으로 변하게 되면 전면 침공을 하는 것 보다 못한 상황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발해부흥운동]]이 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9월 23일 옛 도읍 [[부여군|사비성]]을 포위하고, 또한 [[공주시|웅진성]]도 공격하며 옛 백제 땅을 거의 되찾는 듯 했으나, [[신라]]군의 급습으로 백제 부흥군은 성 20여 개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부터 내분의 조짐이 보였는데, 《일본서기》에는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분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 무라지(狹井連)[*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 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 풀네임은 에치노 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왜국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타쿠츠는 훗날 [[백강 전투]]에서 전사했다.]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며,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일 뿐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 이렇게 부여풍은 복신과 왜군 장수 타쿠츠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뜻대로 피성을 부흥운동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지만, 천도한 직후 [[김흠순]]과 [[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라북도 일대인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백제부흥군의 4개성을 신라군이 점령한 것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나온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4개 성을 신라에 빼앗긴 후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했으므로 결국 두 달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되었다. 이런 의견 충돌과 잘못된 판단이 후술할 백제부흥군의 내분과 연결되었을 수 있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 3년(햇수로는 4년)간 저항했으나 부흥군의 주요 세력인 [[복신]]과 [[도침]]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도침이 복신에 의해 살해당했고, 복신이 풍왕마저 죽이려 하자 풍왕이 선수를 쳐 복신을 살해했다. >“당시 복신이 그 병권을 오로지 한 뒤 부여풍과 점차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고 굴실(窟室)에 누워 있으면서 장차 부여풍이 문병오면 습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그가 믿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였다” >---- >'''《[[신당서]]》 권 제220 <동이 열전> 제145''' ---- >여름 5월 계축 초하루 이누카미노 키미(견상군, 犬上君)[* 이름은 누락됐다.]가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고구려|고려(高麗)]]에 알리고 돌아왔다. 석성(石城)[* 현재의 부여군 석성리로 추정]에서 규해(糺解)를 보았는데 규해가 복신의 죄를 말했다. >6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 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 등이 신라(新羅)의 사비기노 강(沙鼻岐奴江)[* 학자마다 해석이 달라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근처 2개의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 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할 바를 알지 못했으므로 여러 신하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하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복신이 곧 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 복신은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초기 부흥운동을 지도했고 백제부흥군이란 것도 복신이 쌓아올리고 부여풍은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였으므로 복신의 공백은 부흥군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 내분에 빠져 전력을 소진한 백제부흥군은 663년 9월에 3만여 명에 달하는 왜군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분위기를 쇄신하려고 했다. 그리고 백강에서 당군과 대치했는데, 알고보니 당군을 이끄는 장수는 부여풍의 친형 [[부여융]]이었다.[* 부여융은 660년 사비성 함락으로 아버지 [[의자왕]]과 함께 붙잡힌 직후 당에 투항했다. 이후에도 부여융은 신라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수장인 웅진도독으로 재직했다.] 백제부흥군이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내세우자 당나라는 부여풍보다 직계 왕족인 부여융을 전향시켜 내세운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bwi1cKeHN1sqk8veo5_1280.png|width=100%]]}}}|| || [[백강 전투]] || 결국 백제 - 왜국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부여융을 포함한 신라 - 당 연합군에 의해 대패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 등을 비롯해 학자에 따라선 왜국의 지원군을 포함한 백제 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간 시기를 백제라는 국가의 멸망으로 보기도 했다. 660년에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에서 예식진의 매국 행위로 의자왕이 끌려갔지만 사실 200년 전에도 개로왕이 전사하고, 위례성이 털리며 한성백제가 멸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서기》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었다."라고 기록했다.] 660년의 멸망은 두 번째, 풍왕의 몰락이 실질적인 멸망이라고 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