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여풍 (문단 편집) == 여담 == * 부여풍의 후손인 여선재(余善才)가 [[송나라]]에서 [[고려]]로 환국, [[의령군|의령]]에 정착하여 [[여(성씨)|의령 여씨]]의 시조가 되었다. * 그의 아들 중 [[부여사|부여사]](扶餘絲)는 지금 일본의 나라현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정쟁에 휘말려 [[미야자키현#s-5|규슈 미야자키 현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부여사의 후손으로 추정[* 부여사의 망명은 일본 미야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 측 문헌에서만 나온다. 부여사 망명 기록 이후 정가왕이 나오기 때문에 부여사 - 정가왕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게 아니냐는 추측.]되는 부여정가(禎嘉)는 스스로 백제왕을 칭하며 불교신앙, 건축술, 농업 기술 등을 전파했지만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s-2.2.1|718년 (아마도 신라의) 자객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부여화지와 함께 전사하고 만다.]]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조. * 일본에 있을 때 [[양봉]]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양봉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이 해([[643년]])에 백제의 태자 여풍(餘豐)이 꿀벌 둥지 네 개를 미와산(三輪山)에 풀어 사육하였다. 그러나 결국 번식시키지 못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 * 한국 [[대체역사소설]]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 현대인 주인공이 부여풍에게 빙의하여 고생 끝에 망했던 백제를 되살리고 오히려 신라를 멸망시키며 고구려 왕위를 선양받아 삼국을 백제의 깃발 아래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