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원지쟁 (문단 편집) === 대독절교안 === 한편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라 온 세계가 어수선하였다. 일찍이 세계대전이 발생했을때 위안스카이는 1914년 8월 6일 중립을 선포했으나 연합국으로부터 차관과 무기원조를 받고 제제에 대한 열강의 승인을 얻기 위해 연합국에 참전 의사를 타진했으나 [[일본 제국]]은 중국이 세계대전에 참여하면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발언권이 높아질 것을 우려하여 이에 반대했고 위안스카이는 참전을 단념했다. 하지만 1917년 1월 31일 [[독일 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발표, 2월 2일부터 중립국, 교전국 선박이 영해에 들어올 시에 공격할 것이라고 선포하자 미국이 2월 3일 독일과 단교하고 2월 4일 주중미국공사 폴 라인쉬가 중화민국에게도 독일과 단교할 것을 권고하는 미국 국무부 전문을 통지했다. 중화민국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중국인의 생명과 재산에 손해를 끼친다고 엄중항의, 이 정책을 취소하지 않으면 외교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다고 독일 제국에 통보했다. 1917년 2월 28일 미국, 영국 등은 중국 외교부에 독일에 선전포고하여 세계 대전에 동참할 것을 권고했다. 중국의 참전에 대해 반대하던 일본은 국제적 고립을 우려하여 1917년 2월, 중국의 참전에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중국에서의 미국 영향력 감소를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전을 종용했다. 열강이 참전을 요구함에 따라 중국 내부에는 참전파와 중립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쉬스창]]은 참전에 찬성하여 돤치루이에게 북양 세력의 확장을 위한 기회라고 주장했다. 또한 [[의화단 사건]]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지급해야 하는 배상금을 더 이상 지급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몰랐으며 불평등 조약 개정, 국권 회수 등 자주권 확보와 국제적인 위상의 강화 역시 노려봄직 했다. 이 때문에 량치차오와 연구계 의원들도 참전에 찬성했다. 량치차오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카밀로 카보우르]]가 [[크림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것을 예로 들어 중국의 지위 향상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했다. 참전파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 1. 협상국이 약소 국가의 권리를 보위한다면서 약소 국가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한다고 하였으므로 참전하는 것이 중국에 유리하다. * 2. 전후에 평화회의를 소집할 것이고, 중국 문제를 제기할 때 중국은 발언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3.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돈독하므로 중국은 미국과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 * 4. 중국의 위신과 권리가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참전 반대론이 우세하였다. 쑨원의 경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 전쟁은 유럽 사람들의 전쟁이지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참전한다는 것, 즉 연합국 측에 가담한다는 것은 오히려 국내정치에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쑨원은 3월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 뿐만 아니라 영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중국에게 참전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국회의원들에게도 전보를 보내 중국인들은 독일인과 다른 유럽인을 구별할 수 없으니 독일과의 전쟁은 그저 반서구주의를 부채질할 뿐이라며 중립주의를 호소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할 시에 중국 내부의 이슬람 교도들이 불안해할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돤치루이가 참전 후 비상대권을 이용하여 입헌정부를 압박할 가능성이 높았다. 쑨원은 자신의 반전 주장을 <중국존망문제>, 영문으로 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대총통 리위안훙, 부총통 펑궈장, 외교총장 오정방 역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로 참전에 반대했다. [[캉유웨이]]도 열강이 싸우는 동안 중국이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반대파들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 1. 협상국과 참전국은 중국 문제에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 2. 만약 독일이 승리한다면 반드시 중국에 보복할 것이다. * 3. 독일은 전쟁 전 중국에 대하여 호감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협상국은 오히려 반대였다. * 4. 정부는 참전하여 그 위세로 반대당이나 민주정신을 해칠 수 있다. * 5. 중국은 작전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세계대전 참전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세계대전에 참전한다는 명목으로 차관과 무기를 들여와 [[안휘군벌]]을 강화시키고 끝내는 그 무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17년 3월 돤치루이는 내각에 <대독절교안>을 제출하였고 각국에 조회하자고 주장했다. 대독절교안은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국회에 상정되었으나 국회에서 대독절교안이 부결되자 리위안훙은 선전문제가 대총통의 권한임을 강조하며 대독절교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총통이 내각의 결의안을 함부로 번복하는 것은 전제군주와 같은 짓이라는 비난이 있었으며 화난 돤치루이는 사직하여 텐진으로 나가버렸다. 펑궈장이 텐진으로 가서 돤치루이에게 사과하고 그를 도로 불러들이는 쑈를 해야 했고 돤치루이는 대총통이 모든 행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복직했다. 결국 영미의 로비로 인하여 3월 10일 <대독절교안>이 중의원을 통과했고 3월 11일 참의원을 통과하면서 중화민국 정부는 3월 14일 정식으로 [[독일 제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이때 독일 제국 역시 로비를 하여 쑨원에게 200만원의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 쑨원은 나중에 이를 부인했지만 해롤드 시프린은 쑨원이 호법운동에 사용한 자금은 독일 제국 정부에서 지불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촌평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