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원지쟁 (문단 편집) == 결과 ==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에 입성하여 연구계 인물들을 대거 포섭, 자신의 내각을 조직하였고 량치차오는 재정총장에 임명되었다. 돤치루이는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국회와 임시약법을 복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8월 14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하였다. 물론 돤치루이의 참전 목적 자체는 동맹국을 패퇴시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럽 전선으로 중국군이 파병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는 관여하였으며 2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도 파견했다. 또한 연합국인 프랑스와의 협정에 따라 근공검학 프로젝트에 실시하여 많은 유학생들을 프랑스에 보냈는데 여기에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리리싼]] 등 유명한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돤치루이는 1917년 11월 10일 임시참의원을 조직, 1918년 2월 <국회 조직법>과 <국회의원 선거법>을 다시 제정하여 신국회를 선거하게 하였다. 1918년 8월 12일에 신국회가 소집되었는데 이는 1918년 3월 8일 돤치루이가 조직한 안복구락부가 절대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어용국회로, 안복국회라 불렸다. 국회 해산 이후 남하한 구 국회의원들은 기존 국회의 회복을 요구했지만 돤치루이는 묵살했다. 이에 [[쑨원]] 등은 7월 17일 광저우로 남하하여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합작, 9월에 1차 광동 군정부를 수립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대독선전안을 가결한 돤치루이는 9월, 남방의 군정부 토벌에 나섰는데 이로 인하여 [[호법전쟁]]이 발발하면서 중화민국은 남북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