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탄 (문단 편집) === 고대~근대사 === 지진과 화재로 인해 역사적인 사료가 될 문서들이나 역사서들이 대거 소실당해, 19세기 이전의 역사는 개괄적인 파악이 가능한 선에 머무른다. 부탄 현지에선 부탄에 처음 정착한 민족을 샤르초프인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인구조사를 할 때는 같은 [[한장어족]]이고 [[불교]]가 대다수라는 이유로 보티야인과 샤르초프인을 그냥 같이 묶고 네팔계만 따로 분류할 때도 있다. 그러나 보티야인들과 같은 티베트 계열이 중국어파와 분리된 것은 이미 선사시대에 있었던 일인 반면 샤르초프인들은 기원전 2세기에야 분리되었기 때문에[* Burling, Robbins. "The Tibeto-Burman Languages of Northeastern India," . Abingdon: Routledge, 2013] 그 사이 많은 차이가 생긴 데다가, [[인도]]의 영향으로 아삼어를 모국어로 쓰는 샤르초프인들도 있기 때문에 보통은 샤르초프인도 따로 집계하는 일이 더 많다. 그런데 티베트 쪽의 역사 기록을 보면 고대로부터 부탄 땅을 로몬(Lhomon, 남쪽의 어두움)이나 몬율(Monyul, 어둠의 땅)이라 부른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샤르초프인들이 정착하기 전 이미 벵골인들이 선주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방향으로 딱히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7세기에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감포]]가 부탄에 2개의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9세기 경 인도의 승려 [[https://ko.wikipedia.org/wiki/파드마삼바바|파드마삼바바]]가 부탄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이러한 티베트인들의 남하는 꾸준히 이어졌다. 이외에도 구전되어 오는 [[전설]]이나 야사들에 따르면, [[몽골]]에서 온 군인들이 부탄을 침략하면서 당시 부탄을 아끼던 [[공주]]가 항복을 거부하다 죽으면서 늪지 거머리가 되어 세계최강의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주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전설의 진실여부를 떠나 외부 세계 최강대국 침략자들도 이 산악지대를 공격해도 이로부터 별달리 얻을 이득이 없었기에 부탄의 땅은 늘 평화를 유지했다고 한다. 때문에 옛날 [[몽골 제국]]이 침략전쟁을 벌일 때와 [[청나라]]의 [[만주족]]이 티베트를 침공하였을 때 다른 유목민족들이 티베트를 정복하자 일부 티베트인들이 부탄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인도나 중국의 기록들에는 15~16세기에는 왕과 승왕(僧王)이 따로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력을 누렸으며, 지방 영주들이 자치적으로 산악령에서 권력을 가지는 봉건제와 같은 정치적 구조를 가졌다고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1627년에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이스테방 카셀라(Estêvão Cacella)와 주앙 카브랄(João Cabral)이 부탄을 지배하던 [[티베트 불교#종파|까규빠]][* 이 당시 까규빠는 겔룩빠와의 경쟁에서 패배해 티베트에서는 영향력을 상당히 잃어버렸다. 하지만 부탄에서는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까규의 분파인 둑빠 까규의 법왕은 부탄 국왕의 국사(國師)로 대접받는다.]의 승려이자 영주인 응아왕 남걀(Ngawang Namgyal)을 알현하고 [[총]]과 [[망원경]]을 바쳤으며, 티베트의 침공에 대비하는 차원의 군사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응와왕 남걀은 이를 거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저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가톨릭]] 개종 및 가톨릭 선교 자유화와 같은 종교적인 조건을 내세웠으니 거절했던 것. 그리고 남걀은 이런 지원 없이도 티베트 침공을 막아냈다. 17세기 경, 티베트의 5대 [[달라이 라마]] 아왕롭상갸초는 전 티베트영역과 그 영향력하에 있는 작은 왕국들을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1629년, 1631년, 1639년, 1647년에 걸쳐 무려 4차례나 부탄을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악이 받친 티베트는 몽골의 지원을 받아 1714년에 또다시 부탄을 공격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지금도 부탄에는 티베트와 싸우던 요새 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로써 결과적으로 동족인 티베트와 부탄은 완전히 갈라지고 말았다. 물론 부탄 또한 같은 티베트계 국가인 옆동네 [[시킴]]을 몇 차례 침공한 전력이 있으니 완전한 피해자는 아닌 셈이다. 게다가 '''외세인 영국군과 함께''' 동족인 티베트로 쳐들어간 적까지 있다. 사실 다른 티베트계 왕국인 무스탕 왕국 역시 네팔의 편에서 티베트와 싸우다가 네팔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의 일도 있었다. 1864년 부터 일어난 앵글로 부탄 전쟁에서 패배하고 영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한다. 1903년 티베트에 같이 침입한다. 1907년에 동부지방 영주이던 '''[[우겐 왕축]]'''이 [[절대군주제]]를 선언하며 [[왕축 왕조]]가 세워졌다. 이후 친영정책을 펴며 영국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지방영주세력이 차지하던 영토를 통합해나가며 현재의 부탄 영역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영국]]이 부탄의 수장격이었던 우겐 왕축을 국왕으로 정식공포하면서 비로소 세계사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대신 1910년 외교권을 영국에 양도하며 보호령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