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북경정변 (문단 편집) === 펑위샹과 장쭤린의 내통 === 1922년 10월 31일, 펑위샹은 육군 검열사로 발령받아 남원에 주둔했다. 우페이푸는 매월 120만원의 군비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펑위샹은 병사들에게 정치교육을 행하며 엄히 조련하여 강한 기율을 가진 부대로 만들며 기회를 도모했다. 그러던 중 1923년 봄, 봉군 사령부 참모처 부흥패가 장쭤린의 밀명을 받고 베이징을 방문했다. 부흥패는 펑위샹의 참모장인 유기의 육군대학 동창으로 평소부터 유기와 자주 왕래하던 사이였는데 유기를 만나는 척 하며 유기에게 펑위샹과의 만남을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유기는 펑위샹을 찾아가며 유기에게 만약 자신에게 전화가 온다면 즉각 남원의 검열사 관저로 오고 그렇지 않다면 봉천으로 달아나라고 한 다음에 펑위샹을 찾아가 부흥패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펑위샹이 부흥패를 만나겠다고 하자 유기가 부흥패에게 전화를 걸었고 부흥패가 즉시 남원으로 가서 펑위샹을 문안했다. 펑위샹은 베이징엔 이목이 많으니 일단 봉천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어 펑위샹과 접촉한 것은 베이징의 순승왕부 관저를 관리하던 장쭤린의 부관 마병남이었다. 마병남은 펑위샹의 교제처장 장수성의 친구였는데 또한 과거 펑위샹이 20진 보병 중대장 시절에 마병남은 연대 서기관을 지내 펑위샹과도 안면이 있었고 둘다 기독교도라 종교적으로도 친밀했다. 마병남은 장수성과 긴밀히 접촉하며 펑위샹이 봉천군벌과 연계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했고 이후 직예군벌이 장쭤린의 순승왕부 관저를 몰수하면서 봉천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봉천으로 돌아가 장쭤린에게 펑위샹이 장쭤린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장쭤린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마병남을 다시 베이징에 보내 마침 결혼식을 올리던 펑위샹의 하객으로 위장하게 했다. 남의 의심을 사지 않게 위해 베이징 공익연합회 총간사 유석렴과 동행한 마병남은 전 베이징 기독교청년회 간사 자격으로 장쉐량을 대표하여 결혼식에 참여했다. 예식 이후 장수성과 마병남이 펑위샹을 만나 장쭤린의 합작 의사를 타진했고 그 말을 들은 펑위샹은 껄껄 웃으며 "큰 일 하느라 당신의 책임이 많겠구먼."이라고 했다. 이렇게 펑위샹과 장쭤린의 합작이 성사되면서 장쭤린은 펑위샹에게 일본돈 200만 엔과 여러 군수품을 제공하는 등 비밀리에 펑위샹을 원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