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경정변 (문단 편집) === 펑위샹의 회군 === 준비를 마친 펑위샹은 9월 24일 회유를 향해 출발했지만 일부러 각 부대로 하여금 느리게 진군하게 했다. 회유에 도착해 3군 사령부를 설치한 펑위샹은 28일에야 밀운에 도착, 장홍우를 밀운으로 불러 회군에 대해 논의했고 10월 1일 고북구에 도착했다. 이는 정상적인 행군속도보다 2배 이상 느린 속도였다. 펑위샹은 잠시 진군을 멈추어 도로를 수리하고 방비를 갖추는 한편 녹종린에게 베이징을 향해 행군 연습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호경익이 2로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우페이푸는 호경익에게 왕희경 부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지만 호경익도 출정을 지연하였고 그 사이 펑위샹은 돤치루이, 장쭤린과 연락하며 역습의 시기를 도모했다. 우페이푸는 펑위샹을 감시하기 위해 부총사령관 왕승빈을 보냈지만 우페이푸와 친밀하지 않던 왕승빈은 도리어 펑위샹과 한패가 되었다. 10월 11일 펑위샹과 참모장 유기, 웅빈은 고북구에서 란평으로 이동하여 돤치루이의 대리인 가덕요와 회담했다. 봉천군 [[리징린]] 역시 장쭤린에게 무전으로 지시를 받고 펑위샹 부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장쭤린은 펑위샹과의 연계를 위해 산해관을 강타했고 우페이푸가 산해관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장홍우가 알려오자 펑위샹은 때가 되었음을 알고 10월 19일 장지강, 녹종린, 이명중, 유욱분, 유기, 등옥산 등을 소집하여 회군을 선언했고 이에 장령들이 모두 지지했다. 펑위샹은 녹종린에게 즉시 밀운에서 베이징으로 회군하고 손량성, 장유새에게 녹종린을 지원하게 했다. 또한 북원에서 장홍우와 합류해 베이징에 입성해 베이징 경비를 맡게 했다. 또한 이명중에겐 고북구에서 장신점으로 이동해 경한선, 경봉선의 교통을 끊고 희봉구의 호경익에게는 남으로 돌아 란주와 군량성을 점령하여 직군을 끊어 우페이푸의 회군을 막게 했고 손악에게는 차오쿤의 경호부대와 우페이푸의 잔여 부대를 감시하게 했다. 이어 승덕의 장지강, 쑹저위안에게도 기일에 맞춰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10월 22일 펑위샹 휘하 22사단이 북원에 도착하였고 녹종린, 장홍우, 손량성, 장유새가 여단장 회의를 열어 저녁 8시 베이징을 향해 회군을 시작했다. 0시에 녹종린이 베이징 안정문에 도착했고 손악의 수비병들이 문을 열었다. 10월 23일 새벽 1시, 기차역, 신문사, 전화국 등 모든 교통, 통신 기관들이 펑위샹의 병사들에게 점령당했다. 펑위샹의 군사들은 각 길목들을 점거하여 자동차를 배치하여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때 차오쿤의 동생 조예와 측근 이언청 등이 모두 총살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등 베이징의 긴장은 높아져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