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북경정변 (문단 편집) === 베이징 함락 === 10월 23일, 민폐금지, 애민, 결사보국 등의 완장을 두른 펑위샹의 병력이 총통부를 포위하고 각 대문과 여러 교통요지에 배치되었다. 베이징에 잔류했던 총통 경호대와 조사걸 여단은 모두 무장해제되었고 펑위샹은 호경익, 손악과 연명으로 평화를 요구하는 전문을 발표했다. 10월 24일, 펑위샹은 설독필을 차오쿤에게 보내 정전령을 내리고 우페이푸의 모든 직위를 박탈할 것을 요구했다. 도리가 없던 차오쿤은 펑위샹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우페이푸를 청해성 독판으로 좌천시켰다. 10월 25일 펑위샹은 중화민국국민군회의를 개최하여 휘하의 부대를 국민군으로 개칭하고 자신이 국민군 총사령관 겸 제1군 군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호경익을 부사령관 겸 제2군 군단장, 손악을 부사령관 겸 제3군 군단장에 임명했다. 또한 휘하의 [[쑹저위안]]을 사단장에 임명하고 녹종린, [[한푸쥐]], 유여명, 석경정, [[스여우싼]], 풍치안, [[쑨롄중]]을 여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쑨원을 북으로 초청하였다. 같은날 펑위샹은 북원회의를 개최, 원로회의를 열어 임시 내각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펑위샹의 요구에 따라 [[옌후이칭]] 내각이 사퇴하고 황부가 국무총리 겸 교통총장에 임명되면서 황부 내각이 들어섰다. [[왕정팅]]이 외교 겸 재정총장, 왕영강이 내무총장, 이서성이 육군총장, [[두시구이]]가 해군총장, 장요증이 사법총장, 왕내빈이 농상총장, 이배기가 교육총장에 임명되어 연립내각이 조성되었는데 두시구이와 왕내빈은 부임하지 않았다. 11월 2일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차오쿤이 하야하고 국무총리 황부가 총통을 대행하면서 직예군벌의 시대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우페이푸는 진황도에서 펑위샹 토벌을 선언하고 차오쿤의 정전령이 가짜라고 주장했지만 펑위샹과 장쭤린의 협공에 전멸당하고 도주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11월 8일 장쭤린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펑위샹은 11월 9일 돤치루이의 초청을 받아 톈진으로 갔고 11월 10일 장쭤린도 톈진으로 이동, 오후에 돤치루이의 자택을 찾아 돤치루이를 베이징으로 초청하였고 11월 15일 돤치루이를 중화민국 임시총[[중화민국 집정|집정]]에 추대하였다. 11월 22일 돤치루이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11월 23일 황부의 섭정내각을 해산하고 24일 취임했다. 잔류한 남방의 직예군벌들도 더 이상 차오쿤과 우페이푸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돤치루이 지지 통전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