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벌론 (문단 편집) == 여담 == 북벌론이 논의되기 전인 [[병자호란]] 당시 의주부윤으로 있던 [[임경업]]이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틈을 타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을 역공한다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 태종은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였으니 발상 자체는 좋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우선 임경업의 군은 위에 언급됐듯이 고작 400명 밖에 안됐다. 고로 원래는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하여 적의 심장부를 역공을 가할 계획이었을 듯 한데,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국내 [[이자성의 난|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다.[* 실제로 명나라는 병자호란 내내 조선에 아무런 지원 병력을 보내지 못했다. 원래는 강화도 방어를 도와주려고 수군이라도 조금 보내주려 했지만, 이마저도 풍랑으로 무산됐다고 한다.] 그래서 임경업이 평안 병사 유림과 함께 연합 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림은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 설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임경업의 심양 역침공 발상은 큰 문제가 3가지가 있었다. 우선 유림이 이끄는 병력조차도 2,000명이었다. 합쳐봐야 2,400명, 그나마 거의 조총수로만 이루어진 병력으로 심양을 침공하는 건 큰 무리였다. 애초에 이 설에서 임경업은 본인에게 5,000명의 군사를 준다면 심양을 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이 본래 생각하고 있던 병력의 반도 채 안되는 숫자다. 다음으로 청군은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경업이 인근 병력과 합류해서 북으로 진군하려면 인근의 청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군 병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4만명[* [[병자호란]] 때 청의 조선 침공군 수가 최대 4만 5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해당 문서 참조.]은 족히 나오기 때문에 설사 임경업이 만약 5,000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해도 청이 군의 일부만 보내서 때려잡아도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청이 아직 명나라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수도를 완전 텅텅 비워놓고 갔을 리가 없으니 심양과 주변에 최소한의 예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정작 유림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함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서 남하하던 중에 [[김화 전투|자모산성 전투]]에서 4차례에 걸친 청군의 공세를 모조리 격퇴한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조가 항복했으니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임경업의 심양 공격론은 2가지 중 하나로 보인다. 하나는 임경업 장군님 만만세 하면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란 것이고,[* 백성들이야 이런 걸 모르니까 "아 그때 심양을 확 쓸어버렸다면..." 이라는 생각을 했을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임경업이 전략적 상황 파악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병력 문제는 김자점의 병력이 2만이었으니 당연히 임경업이 말한 5천을 네배나 뛰어넘는다. 문제는 김자점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그 한시가 촉박한 시간에 김자점에게 달려가서 협조해달라고 할 타이밍이 없었을 것이다.] 이후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명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남녀 120여 명과 말을 회수한다. 의도와 결과는 좋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이를 빌미로 삼아 청군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행동이었고, 조선 조정의 의도도 아니었다.[* 참고로 비슷한 일이 고려시대의 현종때도 있었다. 2차 거란의 침공에서 하공진의 노력으로 철수하던 거란군을 양규와 김숙흥이 공격한 것. 고려사 양규열전에 나온 내용으로 김숙흥이 10,000명을 죽였고 양규가 무로대, 이수, 여리참, 애전에서 6,000명을 죽이고 포로 5,000명을 되찾았는데 그 외에도 전투가 있었고 고려사에는 양규가 한달동안 일곱 번 싸웠는데 많은 적을 죽였고 포로 30,000명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 말, 병장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되어 있다. 양규와 김숙흥의 경우엔 그 활약 떄문인지 단순 헤프닝으로 넘어가지지 않아서 결국 요성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싸웠는데 두 사람 모두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한다. 다만 고려사에서 공통적으로 이 때는 단순히 거란이 물러났다고만 되어있기에 양규나 김숙흥은 그냥 물러나는 '''적군'''을 공격해 죽이고 자국 포로를 되찾은 것 뿐이다.] 화친을 반대한 삼학사가 청나라로 끌려가는 도중 백마산성에서 머물게 되자 임경업이 찾아가 위로하였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임경업, version=165, paragraph=3)]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이 언어·문화적으로 한족에 동화되고 자신들만의 독립국가를 세우지도 못한 채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현대 시점에서 보면 북벌론 자체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물론 실제 효종 치세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미래는 도저히 몰락할 것 같지 않게 보이던 만주족이 몰락한 셈이지만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