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벌론 (문단 편집) == 등장 배경 == [[중화사상]]과 [[소중화]]에 입각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만주족]] 오랑캐([[청나라]])에게 당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중화사상 정통 후계자인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럭저럭 선조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동인과 서인의 사이를 조율하며 일본의 전쟁 준비를 하긴 했으나(이는 실록에서도 꽤 보인다.) 수천에서 2만명이 될 것이라며 왜구 수준으로 오판을 하는 바람에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와 상층부만 알고 있던 조총을 2할 정도 장착한 [[일본군]]에게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몽진을 통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오면서 명나라에게 다급히 SOS를 쳤다. 이에 [[명나라]]는 '전쟁 벌어진거 우리 영토가 아니라 조선의 영토에서 치르는게 더 이득이다.'며 원군을 보냈고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을 병력으로, 은화 900만 냥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당연히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조선에 끼치는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해졌고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 명이 임진왜란 때 파병함으로써 (조선을) 다시 세워준 은혜.]을 강조했다. [[선조(조선)|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와 신흥강국인 [[누르하치]]의 [[후금]] 사이에서 비교적 유연한 정책으로 또 다른 전쟁을 피하는 데 애써왔지만 서인들의 눈에는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로 인식하며 좋게 보지 않았다. [[서인]] 세력은 폐모살제의 죄와 칭제 문제를 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켜 집권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도 정권을 잡자마자 집권을 단단히 만들기 전에 싸움을 벌여봤자 이득이 없어서 기미책을 통해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영토를 점차 확장하며 명나라를 압도하는 대국이 되자 칭제건원하고 조선에 대해 명나라와의 국교 단절과 신속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국왕이 후금의 칸에게 항복의 예를 행하고, 삼전도 굴욕 이전에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기던 강화도도 함락되어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 조야에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북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조선)|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장차의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위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을 정비 개편하였으며, 호란으로 피해를 입었던 성들을 증축해 요새화와 동시에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지방군으로 전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속오군]] 역시 증강되고 훈련이 강화되었다. 군비 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 [[송준길]], [[김집]], [[이완]]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김자점은 [[역관]]과 내통해 북벌 준비에 관한 일, 인조의 묘비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한 일 등을 '''[[매국노|청나라에 모조리 일러바친다.]]''' 영의정 [[이경석]]의 활약 덕분에 위기 모면.[* 조정차원에서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103007_001|청사신에게 뇌물까지 먹였다]](...)] 효종은 지금 전쟁은 무리니까 북벌 준비는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청나라가 어지간히 무섭긴 무서웠던지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허락해 달라고 보낸 주문을 보면, > 이제 준동하는 왜인의 동태가 정말 우려스러운데, 혹시 위급한 일을 당하면 어찌할 계책이 없으니 '''오직 대국에 호소하여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길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동래와 서울과의 거리는 10일도 채 안 걸리는 길이고, 서울에서 황경(皇京)과의 거리는 까마득히 머니, 소방에서 사신을 선발하여 보내 호소하고 대국에서 군대를 조발하는 동안에, 어떤 성지와 어떤 군대로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까. >---- >-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103008_001|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8일 신유 1번째기사]] 왜란을 연달아 겪은 조선 입장에선 아주 근거 없는 부탁은 아니었고 과거 명나라가 왜란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다가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을 알고있던 청나라는 조선이 알아서 막아주겠다고 하니 동태를 살피며 묵인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벌론을 통해 양성된 군대 [[어영청]]이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참여[* 이때 조정에서는 파병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청나라의 군사적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북벌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힘을 받으면서 파병이 결정된다.]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양성한 조총 부대에 의해 청은 러시아를 격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의 조총 사격은 개개인이 조준해서 사격하는 방식이었으나 러시아군은 집단적으로 [[전열보병|화망을 형성]]하는 식으로 운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서양에서도 유명한 그린 재킷 등 조준사격을 주로 하는 [[경보병]] 부대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전열보병의 카운터 병과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