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벌론 (문단 편집) === 북벌 허구론 === 효종이 과연 실제로 청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론을 계획한 것인가 하는 부분은 오늘날 지지를 얻지 못하며, 현대에 와서는 북벌론은 조카[*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차지하여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이 내부 지지를 얻고, 인조대에 청의 통제를 받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조선의 군사체계를 다시 재정비하며 자국 방위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언급된다.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연달아 겪은 조선은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청은 각지의 성곽 복구 및 강화에 간섭하면서 조선의 방위력 재건을 통제하여 방해하려고 했다. 효종은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동법]] 등과 같이 내부 제도를 개혁 및 친청파들을 숙청하며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다수의 성곽과 포대를 구축하고[* 병자호란 이후 인조 치세 동안 청은 조선의 군사력 정비에 간섭을 하였으나, 중국 내로 입관하여 중화의 중심이 된 후인 효종 치세부터는 중원 통치에 신경쓴다고 이러한 간섭이 많이 줄어들고 느슨해졌다.][* 실제로 정벌보다는 장기적인 방어전에 가까운 이유가 주로 강화도에 보루를 세우거나 남한산성을 보수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족한 정통성을 북벌론을 통해 강화하여 지방 산림층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지방 산림층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조정에 입사하였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 지방 산림층에서는 인조 정권을 '오랑캐에 굴복한 조정'으로 여기고 입사하지 않으려 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 때문에 인조는 인재난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이 입관에 성공하면서 이런 풍조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인조 말년쯤 되면 이들은 조정에 나올 만한 명분이 있으면 나올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효종이 내세운 북벌론은 이런 명분을 제공했다. 이후로 조정에서는 종종 북벌에 대한 논의가 나오게 된다. 다만 이런 북벌론을 이용한 군사력 증강은 산림의 지지는 얻었을 지언정 실무 관료층 및 현실정치에 이미 오랫동안 있었던 [[대신]]들의 지지는 얻지 못한 듯하다. 특히 이들의 중심 인물인 [[김육]]은 대표적인 북벌반대론자로, 이 점에서 효종과 종종 충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육은 죽을 때까지 계속 효종에게 신임받고 중용되었는데, 이는 효종의 북벌론이 실질적인 북벌 계획과는 거리가 있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로 꼽힌다. [[기축봉사]]를 예로 들어 '서인들은 말만 앞섰고 효종은 약간이라도 군비를 증강시켰다!'는 주장을 그대로 정설로 하기엔 힘든 것이, 송시열이 오히려 이 북벌의 명분 때문에 효종에게 끌려다녔다는 해석도 있다. 현실적으로 청나라와의 국력 격차는 엄연한 사실이고 북벌의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송시열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북벌을 반대하는 것은, 그 명분을 중시함으로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송시열로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 효종이 그 명분을 앞세워서 북벌론을 주장하며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을 압박하자, 위에 언급한 정신을 갈고 닦으며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등의 신중론을 주장하는 수준으로 물러서며 효종의 국정 운영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세월이 흘러 숙종 초에도 [[윤휴]], [[허적]]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를 두고,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이는 1674년 청에서 오삼계의 난, 일명 [[삼번의 난]]이 일어나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곧 안정을 되찾고 윤휴 일파가 1680년 실각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위세로 보면 동아시아에서 현재의 [[미국]] 수준의 [[천조국]]이며 동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적인 강대국이었으므로[* 청나라 전성기에는 국력이 세계 최강의 반열에 들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구가 지금만큼 일어서지 못하였다. [[오스만 제국]]만 해도 근대에 들어서야 유럽의 병자였지, 이때까지만 해도 전성기라서 서구 기독교 국가들과 페르시아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성리학자들도 현실적으로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76년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을 때 호응해서 [[동녕 왕국]]까지 연합해 북벌을 감행했다고 해도 삼번은 의외로 쉽게 제압당했고[* 사실 세력을 따지면 삼번은 굉장히 강력해서 충분히 청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강희제도 삼번을 우습게 본것을 후회하며 반성문을 써서 신하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정도였다. 하지만 손발이 너무 안 맞은데다, 삼번은 청나라가 명나라 멸망 이후(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의 난]]임) 명나라의 후예인 남명을 멸망시키고 청나라의 신하가 되어 중원을 장악하는 데에 협조했던 자들이라서 한족들에게 미움을 받아 지지층을 결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령 삼번이 청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오주가 중원의 새로운 왕조로 완전히 자리잡더라도 이민족인 만주족의 청나라에 부역했던 과거 때문에 중원 한족 왕조로서의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고 결국엔 다시 왕조를 전복시키려는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면 명나라의 주씨 왕조는 단지 [[홍무제|창업군주]]가 미천한 출신이라서 그 쪽으로 정통성 문제가 있었을 뿐, 그 창업군주가 몽골족의 [[원나라]]에 부역한 적이 없이 외세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한족 왕조로서의 정통성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삼번이 청나라에 부역한것은 반감을 크게 가질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사림층은 무리한 외정보다는 내치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말로는 북벌을 외쳤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사실 [[숙종(조선)|숙종]] 연간의 청나라 공격은 가능성이 높았을 수도 있겠으나''''''''' '''당시 황제가 [[청나라]] 최고의 명군 [[강희제]] 시기라 청나라의 국력은 압도적이였고'''''' 그 외 조선의 여러 내부 문제까지 겹쳐서 사실 ''''''북벌을 감행했다가는 중원을 재진압하고, 준가르와 티베트, 몽골까지 정복한 청나라에게 병자호란은 저리 가라 할 만큼 처참한 보복을 받고 조선 왕조는 멸망하고, 심지어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게 병탄되어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성이 되고 중국과 별개의 국가였지만 결국 중국에 편입된 신장과 티베트, 내몽골, 운남성처럼 한민족 전체가 중국의 소수민족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현명했다~~'''''''''''' 어떤 의미로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기 충분하고, 실제로 조선 후기에 이미 북벌론은 [[허생전]] 등에서 볼 수 있듯 명분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