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사 (문단 편집) == 의의와 평가 == 북사는 특이하게 표(表)와 지(志)가 없다. 본기에서는 기전체 체례대로 북방 4개의 왕조를 나누어 구분했지만, 열전에서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가계를 묶어 왕조의 구분을 짓지 않고 북조사를 하나의 체제로 만들었다. 북사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전의 사서들은 당시의 원시적인 문장을 정리하여 편찬했지만, 남사에 비해 북사는 이연수가 심혈을 기울어 한장 한장 편찬했다. [[진나라]](陳) 말기에 강남 지방의 백성들이 [[수나라]]에 저항한 기록이나, 이해전(李諧傳)에서 남북조 간의 공식적인 기록은 이전의 중국 정사에서는 엿볼 수 없다. 그렇기에 사료적 가치가 크다. 오죽했으면, [[자치통감]]을 집필한 [[사마광]](司馬光)이나 [[청나라]]의 고증학자 조익(趙翼)은 모두 번잡한 문장은 줄이면서도 내용은 더욱 풍부해진 ‘가사(佳史)’ 혹은 ‘양사(良史)’라고 평가하였는데, 일관된 체제와 간결하고 중립적인 서술을 평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사 역시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있다. 왕명성(王鳴盛)의 『십칠사상각』에서 북사는 위수의 위서를 필사하였을 뿐 오히려 많은 기록을 삭제하였다고 지적했다. 또한, 조익도 남북조 간의 전투 기록이 부실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북사는 이전의 정사와는 대조적으로 일관성과 중립성이 나타나 많은 학자들에게 호감을 샀다. [[분류:남북조시대]][[분류:중국 정사]][[분류:관찬사서]][[분류:기전체]][[분류:통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