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송 (문단 편집) === 부실한 군사력 === [[https://cafe.daum.net/historywar/Nwo/3722|송나라 군대 병과들을 묘사한 그림]] 송은 뛰어난 관료제와 중앙집권화 성공, 풍성한 경제력, 꽤 넓은 국토,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이 이상하리만치 '''실속이 떨어졌다'''.[[https://cafe.daum.net/historywar/Nwo/3645|#]] 실제 송의 국방력은 마냥 소홀했다고 보기엔 그 규모가 꽤나 방대했는데, 송나라 후기의 병력수는 무려 '''126만명'''에 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 병력은 송 인종 시기에 서류상의 병력이었고 실제 병력은 이보다 더 적다고 여겨지긴 하나, 그래도 결코 적은 규모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대단한 이유는 당장에 수나라도 100만 대군을 진짜로 운용했다가 망했기 때문이다.] 허나 현실은 이런 규모가 무색하게 실제 전투에서 송군이 승리한 횟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특히 정복 왕조와의 전쟁에서는 상당수가 개박살이 났다.[* 다만 이건 송나라만의 특징은 아니다. 유목민족들은 강력한 전투력으로 한족 국가나 중국 통일왕조, 한국사 국가들을 터는 것이 매우 빈번했다. 송나라 다음으로 들어선 한족 왕조인 [[명나라]]도 유목민족인 몽골과 만주와의 전쟁에서 참패한적이 많으며 국토가 유린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만주족의 [[청나라]]조차 유목제국인 [[준가르]]와 전쟁을 치룰때 패한적이 있고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고 게릴라전으로 큰 피해를 입자 초토화와 섬멸전이라는 초강경책을 꺼내들어서야 제압할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 중 하나는 송 조정이 당나라 이래로 무인(절도사)들의 힘이 강해져서 통제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반란까지 일으켜 왕조를 갈아치우는 사태를 경험했기 때문에[* 당장 송나라 태조인 조광윤부터가 이런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송나라 건국 초기에도 절도사가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무관 대신 문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문제는 이 문관들이 전투 경험이 없고 군대를 잘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잘 모르는데다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 한 예가 바로 [[동관(북송)|동관]][* 다른 환관들과는 달리, 이헌을 따라 서북방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후 청당(칭하이 지역)을 개척하고 서하, 강족 및 토번과의 전쟁을 주도하는 등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났다.]과 [[서희(북송)|서희]][* 왕안석의 신법파였고 1082년 서하와의 접경 지역에 영락성을 쌓을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병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듬해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난전 중 전사했다.]이다. 반면 한·당은 [[이세적]], [[이정(당나라)|이정]] 같이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 아는 문관을 임명했기에 흉노, 돌궐과의 전쟁에서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무인들의 지위는 전대 왕조들보다 격하되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몇몇이 있다. * 북송의 명장이었던 적청의 옛 부하인 초용이라는 자가 부하들의 고발로 한기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적청은 한기를 찾아 용서를 빌려고 했는데, 정작 한기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하여 적청은 한기의 처소 밖에서 '초용은 전공을 많이 세운 [[호남]]아입니다'라고 빌었지만, 한기는 '과거시험 진사 급제도 못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호남아 소리를 듣는가'하며 쪽을 준 뒤, 초용을 처형했다. 이렇게 무관을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적청은 꼼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총관(당시 적청의 직위)께서는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라고 알려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한기에게 처벌받을까봐 두려워서였다.[* 다만 초용의 죄목이 군량 착복에 군수물자 횡령이라는 중죄이니 한기는 잘못이 없고 초용과 적청의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핀트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전근대의 중국은 엄격한 법치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과거에 세운 전공 등을 감안해서 처벌을 면하거나 경감하는 것도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한기 또한 법치주의적 관점에서 적청을 반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기의 말대로라면 '진사 급제한 호남아'는 똑같은 죄를 지어도 처벌을 면하거나 경감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설령 현대 법치주의적 관점을 적용해서 초용, 적청이 잘못했다 쳐도, 한기가 한 말은 '공로를 세워도 가방끈이 짧으면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인우월주의 및 무인경시사상이 내포된 막말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무신정변]]을 보면 알겠지만 이 역시도 무인에 대한 천대로 벌어진 일임을 감안해 보면 송나라판 무신정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다.] * 진종 대에 이광보라는 자가 진사에 급제했는데 검술에 능하다는 이유로 황제에 의해 진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백성들이 검술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송군이 오합지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1126년 음력 2월 송의 지방관 중 한 명이 무슨 배짱인지 공을 세우겠답시고 애먼 지나가던 금나라 사신단을 공격했는데, 이때 '''송의 [[보병]]이 무려 2,000명이나 동원되었다'''. 그렇게 송나라 장군 이간과 보병 2,000명은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지만 황당하게도 이 사신 일행은 [[기병]], [[궁기병]]이긴 했지만 오히려 '''송군이 금나라 호위[[무사]] 17명에게 가볍게 와해되었고, 금의 사신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심지어 이때 금나라 호위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을 정비하였다'''. 송군이 진을 제대로 완성한 뒤, 금군의 공세를 버티며 수적 우세를 통해 공격했으면 송군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송군은 애초에 진을 짜기는 커녕 금 기병들이 양익에서 궁시를 날리고 중기병 7명이 대열을 짓밟자 장창으로 버티기는 커녕 자신들끼리 밟고 도망가며 와해되어 버렸다. 싸우다가 죽은 게 아니다. 총 사상자가 1,000명인데 그 중 금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로 발생한 사상자는 100명이 안 된다는 점에서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때 투입된 병력은 그나마 전투력이라는 걸 갖고 있기라도 한 중앙군도, 변방수비군도 아닌 그냥 밭을 갈다가 끌려나온 민병들이기는 했다.][* 다만 [[기관총]]이 등장하는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대부분의 전투에서 기병은 보병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대포와 화약을 지닌 네덜란드 독립군 2만 5천 명이 불과 1200명의 스페인 기병대가 돌격하자 놀라서 도망치다 무려 8천~1만 명이 죽는 바람에 어처구니없이 패배했던 젬블루 전투(1578년)도 있었다. 이 젬블루 전투에서 승리한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고작 20명에 불과했다[[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Gembloux_(1578)|#]].] 게다가 해당 기록은 금나라도 아니고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쓴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송과 금 양국간의 전쟁 및 평화교섭을 기록한 책]의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기록으로 '''승리자가 멋대로 부풀린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닌 게 금은 이 전투를 계기로 송군의 상태가 영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다음해 대군을 동원해 바로 수도 카이펑을 공격하고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는 [[정강의 변]]을 일으키게 된다. 다만 이와 별개로 군사비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는데 정1품 재상의 식비 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반해 장군인 정2품 절도사의 식비 보조금은 400관이었다. 장군들의 녹봉도 등급에 따라 매월 3,000관 내지 10,000관을 받았다. 군인들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대신에 '''많은 봉급'''이라는 반대 급부를 주었던 것이다. 송 태조가 일부 개국공신들을 쳐낼 때 피비린내 나는 숙청 대신 휘하 번진 절도사들에게 많은 재산을 줘서 권력 대신 고향에서 개인의 행복 누리며 살게 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하지만 북송 시절에는 이미 '''"좋은 [[철(원소)|철]]은 [[못]]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는 [[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잘 서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점은 비단 북송 시절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역대 중국 왕조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장군인 [[척계광]]이나 [[청나라]]의 장군인 [[증국번]]이 거느린 군대가 정예로 유명했던 것은 엄격한 군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군대에는 순박한 농촌 청년들만 병사로 모집을 했고, 도시의 불량배나 범죄자들을 병사로 받지 않아서 군기가 엄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근대 유럽, 특히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병 지원자들 중에 범죄자의 비율이 높아(해군의 경우는 감형을 조건으로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군기가 엄격했고 태형 등 체벌이 성행했다. 현대에도 나름 명예로운 경력으로 취급받는 [[미군]]이나 [[중국 인민해방군]]조차 신체는 건강할지언정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없는 청년들로 채워지고 있고 [[자위대]]는 그냥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수준이다.] 그 외 송의 군사력이 약했던 원인 몇가지와 재평가할 부분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