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북송 (문단 편집) === 재평가할 부분 === 다만 그렇다고 송나라군이 마치 [[동네북]]처럼 매번 털리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요]]를 상당히 몰아붙였고,[* 사실 요나라 시절부터 송이 북방 민족에 시달렸다는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요는 200여년간 송의 영토를 정복한 역사가 거의 없다. [[전연의 맹]]의 경우에도 내용에서 보듯 송의 황제가 형이고 요의 황제가 아우이듯 그렇게 굴욕적인 화친 조약 수준은 아니다.] [[서하]] 및 [[금나라]]와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심지어는 고토를 일부 회복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그 이전 시대인 한 · 당이나 이후의 명처럼 유목민족과 소수민족을 정벌하고 주변국들의 내정에 간섭하며 주변국을 공격하는 수준이 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저질 군대와 달랐다. 그리고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였다. 또한 북, 남송 합쳐 '''직계 왕조'''로 300여년을 유지한 것도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특히 중국의 한족 통일 왕조들 중에서 300년 이상을 유지한 건 한과 송 뿐이다.[* 물론 한이랑 북송과 달리 남송의 경우 정통 왕조일지언정 통일 왕조로 보기는 어렵다.] 명 또한 남명을 포함하면 294년 가량 존속했지만 사실 남명 정권은 합치기에는 뭣한게 여러 지방에서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명나라 후신을 자처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서 본 개념으로, '''단일 왕조가 아니었다.''' 때문에 망한 후 남쪽으로 이동한 다른 정권인 [[동진]], [[남송]]과 같은 선에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남송은 1127년~1279년 152년이나 존속했다. 심지어 그 때문에 혼란스런 [[동진]]마저 사직을 그래도 100년 넘게 보존했는데 남명은 20년도 못갔다. 남명은 1644년~1662년 겨우 18년을 갔을 뿐이다. 한마디로 재위한 황제들의 기간을 다 합쳐도 20년이 안되는 것이다. 청의 경우에도 후금 시절까지 포함하면 296년 존속했지만 초반에는 만주에만 머물렀을 뿐이고 중원에서는 그보다 부족한 268년 동안 이어졌다. 실제 [[남송]]은 [[금나라]]에 바로 망하지 않고 금나라를 포함한 수십여 국가를 멸망시킨, 당대 세계최강 [[몽골 제국]]에게 망했다. 그것도 한방에 폭삭 무너진게 아니라 장장 40여년에 걸친 항전으로 몽골제국이 고생한 끝에 멸망시킬 수 있었다. 실제 몽골제국이 전력을 다해 정복전쟁을 벌인 국가들 중 이만큼 버틴 국가는 송이 거의 유일하다.[* 이미 저 멀리 동유럽, 중동 원정은 송 멸망 훨씬 이전인 1250년대에 거진 마무리되었음을 상기하면 코앞의 남송이 오래 버틴게 대단한 것이다. 이러한 남송 원정에서의 국력 소진 및 늦은 통일은 원의 일본, 베트남 원정 실패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전한]], [[당나라]], [[명나라]]처럼 경제력 + 군사력으로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송나라는 적어도 경제력으로 자주 국방을 300여년간 유지할 수준이 되었다. 송대가 문치주의였던 건 맞지만, 그것을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북송이 가지고 있던 지리적인 약점도 있었다. 바로 [[연운 16주]]의 상실이었다. 거란과 여진이 이 연운 16주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송과 전면 대결을 할 수 있는 국가 세력으로 성장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연운 16주는 송 이전 한족 왕조들의 북방 방어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런데 이 요충지를 송 건국 이전에 이미 거란이 몽땅 차지해버린 것. 연운 16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연운 16주 이남에는 딱히 지리적으로 진격에 방해가 되는 지형이 없으며 화북과 강남의 평야 지대로 직행할 수 있는 루트이다. 즉 북송은 처음부터 방어상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연운 16주를 넘겨준 후진의 시조 석경당의 평가는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매우 나쁘며 아예 그를 [[한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나마 장안과 낙양은 수비에 유리한 지형이지만 북송의 수도 개봉은 말그대로 개활지 한복판이라 기병을 가진 대 유목민족 방어에 몹시 취약했다. 이때문에 금이 공겨해왔을때는 꼼짝없이 당하여 함락된다.] 반면 남송 때는 국토가 쪼그라들고 장강, 회수, 사천의 산맥 등 험준한 지형을 국경으로 삼게 되면서 오히려 방어에 유리해졌다.[* 이때문에 금은 남송을 멸망시키는데 실패했고 몽골도 남송 멸망에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멸망시킬수 있었다.] 또한 왕안석의 신법 시기 당시에도 송은 서북방으로 영토를 적극 확장하기도 했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던 시기였던 1068년에는 [[왕소(북송)|왕소]]가 "평융책"을 송 신종에게 제시하였고, 왕안석과 송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하황 지역[* 오늘날 [[칭하이 호]] 일대로, 안사의 난 이래 토번국에 점령당했으나 당 선종 때 회복하였다. 그러나 장의조 사후 다시 토번에 점령당했다.]을 수복하게 되었다.([[희하개변]]) 그러나 이후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1081년 이헌. [[충악]]. 왕중정, 고준유, 유창조를 필두로 5로를 통해 서하를 정복하고자 했으나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고 군량 문제가 심각하여 실패했고 1083년에는 영락성을 신축하여 서하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실패했다.] 왕안석 실각 및 송 신종 사후 사마광을 위시한 구법당이 득세하자 하황지역을 다시 토번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송 휘종 재위 시 [[동관(북송)|동관]]이 하황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토번 군사들을 궤멸시킴으로써 송 신종 때 개척하였던 영토를 다시 되찾았고, 황두회흘까지 점령함으로써 농우도호부가 설립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사실 졸전 중 송의 사례가 많이 알려져있다보니 편향적 시선을 많이 받아 그렇지, 무경총요 같은 걸 보면 이론적으로는 [[군사학]] 진보도 상당히 이룬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실사용자인 전문적인 군인들이 문제라 상당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많이 겪었다. 이점은 지나친 문치주의의 폐해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송나라를 '약체' 취급하는 관점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상기된 바와 같이 중국 역대 통일왕조의 존속기간을 비교해보면 거의 320년에 달하는 송나라의 존속기간은 한나라의 뒤를 이은 '''2위'''에 해당한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식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해보면 약하기는 커녕 오히려 명백히 강자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송나라가 주변국에서 군사적으로 강맹한 위세를 거의 보여주지 못한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송나라를 '군사적 약체'였다고 취급하는 관점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송나라의 '유지력'은 충분히 강력했고, 국가의 유지력에 있어서 자국을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은 필수적 요소다. 즉 송나라의 군사력은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자국에 대한 유지력을 지탱할 수준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송의 군사력을 ①'국내의 안정성'과 ②'정주제국의 유목민 대책' 이라는 두 측면에서 다시 살펴볼 수도 있다. 먼저 '''국내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송나라의 문치주의는 <군벌의 발호를 막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군사력의 강화를 포기>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치주의로 인해 송나라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문치주의가 문제다' 라는 분석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화를 댓가로 중앙집권의 확립과 군벌의 탄생 방지, 국내의 번영이라는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른 장수 통일왕조인 한, 명, 당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점은 명백하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결국 군웅(군벌), [[절도사]]의 발호로 멸망했고, 명나라의 멸망에도 [[오삼계]]와 같은 군벌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강력한 외적의 공격으로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어쨌건 지방 군사력의 반란이나 배신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치주의의 결과를 군사력의 약화라는 대가를 확실하게 치른 대신, 군대에 대한 통제력과 정국 안정성이라는 성과도 확실하게 얻은 것. 송나라의 군사제도를 흔히 <반란의 위협을 막는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진짜 위협'''인 외세의 침공을 막는데는 허술했다>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지나치게 근대 이후 고도화된 국가를 기준으로 본 해석일수도 있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입장에서 지방 군사력의 반란은 외세의 침공 못지 않게 '''진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 통일왕조 정도의 규모가 되면, 지방 군사력의 위협이 어지간한 외세의 위협보다 더 심한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송나라 바로 이전의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지방 군벌, 특히 [[절도사]]들에게 권력을 몰빵한 결과 사회의 혼란과 왕조의 몰락으로 갔었기 때문에 송 입장에서도 쉽사리 지방군을 강화하는 선택지를 고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송이 요, 서하, 금, 원 등 외세에 시달렸기 때문에 중앙군 대신 지방군을 강화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 당의 몰락 과정을 지켜본 송 조정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모든 정책은 항상 양날의 검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송이 진짜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은 군의 편제 따위가 아니라 대전략이 부재했다는 점에 있다. 북송 시절 [[요나라]]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금나라]]와 손잡고 요를 쳤으나 그 이후의 대응에 대해서는 깊게 고찰하지 못했고 결국 섣불리 금을 쳤다가 결과로 돌아온 것은 [[정강의 변]]으로 대표되는 카이펑 조정의 함락, 즉 북송의 멸망이였다. 그런데 남송 시절에도 금나라와 [[몽골 제국]] 사이에서 이와 같은 선택이 되풀이되고 다들 결과는 잘 안다. 송은 복수심에 상대(요, 금)를 무너뜨리는데만 혈안이 되었을 뿐 향후 또 다른 상대(금, 원)에 대한 대응 방안이 부재하거나 두루뭉실하였다. 물론 북송 시절과 달리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40여년간 항쟁하였기에 일반화하긴 어렵겠지만 이미 만주와 내몽골, 화북 대부분을 잃고 샌드위치 신세로 축소된 금나라를 감정을 앞세워 몽골과 협공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건 사실이다. 이 역시 결과론적일 수 있지만 금의 세력 축소와 몽골의 발흥이라는 형세 및 [[정강의 변|지난 역사]]에 대해 송이 자세히 고찰했더라면 금나라와 협력하거나 대몽골 동맹을 맺지는 않을지언정 금을 협공하지 않고 최대한 버티게끔 놔두고 이를 방어막 삼아 내실을 강화하는 방책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반에는 금이 남송을 선공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하지만 막판에는 오히려 금나라 사신이 송에게 빌었기 때문에 더욱 유연한 선택의 기회가 있기는 했다. 다만 남송은 금의 멸망 즈음에 몽골과의 전쟁을 고려하여 장강라인 방어선을 강화하였고, 이는 44년에 육박하는 방어의 기초가 되었다. 북송과 달리 참작의 여지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의 대전략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건 송에게 금은 말 그대로 철천지원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1950년 북한의 선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기억이 가시지 않았고,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3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설령 실리적으로 그것이 이득이라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송나라 입장에서 몽골은 잠재적 위협이고, 금은 실제로 북송을 멸망시킨 위협이었다. 우리는 송나라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알고 있으니 금을 지원하거나 최소한 방치했어야 이득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대 송나라인에게 그것을 바라는 것은 과도하게 결과론적인 처사이다. 하다못해 금나라가 몽골의 공격을 견디기 어려움을 느끼고 바로 송나라와 손을 잡으려 시도라도 했으면 협력의 가능성이 좀 더 높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금나라는 그나마 여력이 있을 때 송나라부터 쳐서 국력을 회복하려다 결국 막판까지 몰리고 나서야 비로소 손을 잡자고 부랴부랴 제안한다. 그러므로 송나라 입장에서는 '금과 협력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는 하겠으나, 협력관계의 유지가 가능할만큼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고 볼 수 없다'라고 판단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의 진행과 결과를 모두 알고 있는 후대인의 관점에서야, "그 상황에서는 협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치해두는 것이 더 나았다."고 판단할지도 모르지만, 당장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있는 당대인에게 그만큼 객관적이고 결과론적인 판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는 결국 전근대 국가에서 '국내 안정성'과 '군사력 강화'라는 두 목표가 사실상 서로 상충되는 것이었음에서 기인한다. 당시의 기술적, 제도적 한계에서 군대를 강화시키려면 반독립적인 군사세력의 탄생을 허용해야 하고, 이 반독립적 군사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하여 정국의 안정성을 저해한다. 하지만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사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수록 군대의 유지와 운영에서 비효율적인 면모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봉건제]] 문서에서도 다뤄진 내용이지만 기술적, 제도적 기반이 갖춰진 현대를 기준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면서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면 된다'고 접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선택지에서 송나라의 선택은 '안정성'에 아주 높은 우선순위를 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과연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선택, 예컨데 안정성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군사력을 좀 더 강화시키는 등의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에 대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물론 역사적으로 '가지 않은 길'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이 질문의 정답이 무엇인지도 아무도 답할 수 없겠지만... 송나라의 번영과 존속기간이라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나쁜 선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건 송나라는 이 선택의 결과로써 (보다 군사력에 우선순위를 둔) 다른 왕조들에 비해 오랜 기간 역사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무조건 오래 살아남았으니 더 강하다고 보는 것도 균형을 잃은 관점이겠지만 연운 16주를 잃은 상태로 왕조 초기부터 이미 결집된 상태의 유목제국을 상대해야 했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조보다 오래 견뎌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두번째, '''정주 제국의 유목민 대책'''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흔히 <문약한 송나라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탈에 시달리며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고 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이미지가 소비되지만, 이 역시 공정하게 따지면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에서 북방 유목민의 침탈에 안 시달린 왕조는 없다. 당장 역대 중국 왕조 중 비교적 장수한 왕조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명나라의 멸망에는 북방 유목민(여진족)이 큰 영향을 끼쳤고[* 명나라를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의 난]]이지만 [[숭정제]] 당시 명나라가 농민반란을 변변히 진압하지 못한 데에는 [[명청전쟁]]으로 인하여 주력 정예군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요동]]의 대청전선에 묶여있던 영향이 컸다. 즉 명나라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 여진족은 아니지만, 그 마지막 타격을 받고 쓰러지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몰아넣은데에는 여진족의 영향이 막대했던 것.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에 의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산해관은 수도 북경에서 불과 300km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요동 방어선의 핵심이자 사실상의 최종 방어선이라, 만약 뚫린다면 그 자체가 사실상 국가 멸망 일보직전 상태 돌입이다. 즉, 돌파당하지는 않았더라도 지속적으로 산해관에 공격이 가해진다는것 자체가 명말의 위기상황을 보여주는 한 지표라는 것. 게다가 꼭 여진족의 예가 아니더라도 [[토목의 변]]과 같은 대 몽골 전선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 한족 계열 통일왕조로써 꽤 강성한 편이었던 명나라 입장에서도 북방 유목민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나라의 경우 한나라 자체의 멸망은 유목민과 무관했지만 한나라의 체제를 계승한 [[서진]]이 [[영가의 난]]으로 무너지고 중원을 상실함으로써 한나라가 400년에 걸쳐 구축한 체제 자체를 무너트린 것은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정주 제국에게 있어 유목민은 언제나 두려운 적이었으니 유목민에게 시달렸다는 것 자체가 곧 그 나라가 약체였다는 근거는 아닌 셈. 또한 군사력으로 유목민을 막아낼 힘이 없어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박쥐같은 행태로 신뢰를 잃고 적을 만들었다고 하는 말 역시, 따지고 보면 원래 [[이이제이]] 정책으로 모든 정주제국의 대 유목민 대책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송나라가 특별히 한심해서 유목제국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다른 유목제국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라, 원래 정주제국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유목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 보다는 다른 유목민을 끌어들여 상대하게 하는 쪽이 더 효율적인 선택지였던 것. 한 세력과 손을 잡고 다른 세력을 친 후 손 잡았던 세력을 배신하여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 역시, 원래 이이제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여진족과 손을 잡고 강성한 거란족을 친 후, 그 결과로 거란족이 무너지는 대신 여진족이 성장하면 동맹을 끊고 이번엔 몽골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여진족을 견재하는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이이제이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실행하자니 송나라의 연약한 군사력이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이이제이란 시행하는 측이 명백한 우위에 있을 때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인데 송나라는 군사력 부족으로 인해 전략적 주도권과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휘둘려버린 결과 역으로 유목민들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전적으로 송나라의 문치주의에 있다고 보기는 또 애매한 것이, 일단 송나라가 처해있던 상황 상태가 심각하게 불리했다. 본래 대 유목민 방어의 핵심 거점이어야 할 [[연운 16주]]는 [[석경당]]에 의해 요나라로 넘어가 오히려 유목민의 남진 교두보이자 전략적 거점이 되어버렸고 건국 초기부터 (이이제이가 쉽게 통하는) 부족 단위로 분열된 상태가 아니라 국가 수준으로 결집한 유목민 세력을 상대해야 했던 것. 즉, 문치주의를 포기하고 군사력 확충에 중점을 두었다 하더라도 송이 과연 유목 세력을 상대로 우위를 확실하게 차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역시 결과적으로 본다면 '다른 경우보다 불리한 상황' 에서 '결과적으로 더 오래 버티는데 성공' 한 송나라의 선택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더 좋은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리하자면, 송은 당과 오대십국의 멸망 사례를 참고하다가 지나친 문치주의가 되어버려 송나라의 군사적인 잠재력이 국력에 비해 미약해졌고, 이때문에 대외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며 군사적 방위력보다는 외교적, 경제적 수단에 의존하여 자국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는 것 자체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송이 선택한 외교적 수단은 과정만 놓고 보면 나름의 합리성과 효과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전략 덕분에 오히려 역대 다른 통일왕조에 비해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장기간 국가를 존속시키기까지 했다고 재평가할 여지도 일부 있다. '항상 얻어터지고 털리기만 했던 약체 송나라'라는 이미지는 일면 정확하지만 다른 일면에서는 과장되거나 편협한 관점으로써 역으로 지나친 군사력 지상주의에 기반하고 있거나, 평가의 기본인 '비교'를 무시하고 선입견에 부합하는 부분만을 취사선택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송이 유목민족들한테 무조건 굽신거리는 나라가 아니었는데 변방의 요와 서하에 소속되지 않는 유목민족들인 티베트와 탕구트 부족민들에게는 조공을 받으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변방의 티베트, 탕구트 부족들은 송에게 조공을 바치고 보조군 기병으로 송나라 군대에 복무했고 송도 이들에게서 조공을 받으면서 최대한 잘 대해주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 티베트, 탕구트 보조군 기병대는 송나라 황실 소속의 금군에도 활동하며 황제의 경호도 맡아서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따지고보면 송나라뿐만 아니라 후대왕조인 [[명나라]], [[청나라]]도 군사력으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송나라만 문약했다고 까이는건 부당한면이 있다. 명나라의 경우 [[홍무제]], [[영락제]], [[선덕제]] 시절에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 선덕제 시절부터 식민지로 만든 베트남에게 패하여 독립을 막지 못했으며 몽골한테 처참하게 패한 [[토목보의 변]]을 시작으로 점점 국력이 약해지더니 1550년의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에게 싸우지도 못한채 국토가 유린당했다.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한적이 있다.[* [[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출처]]] 심지어 말기에는 국력에서 매우 열세인 청나라에 약탈당하고 국토까지 유린당했고 나중에는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해 나라가 반란군에게 망하고 만다. 또한 청나라도 17~18세기까지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19세기 [[아편전쟁]], [[청프전쟁]], [[청일전쟁]], [[태평천국 운동]], [[의화단 운동]] 때 보여준 모습은 [[줄루 전쟁]]당시 19세기에 창과 방패들고 싸우던 [[줄루족]]보다도 형편없었으며 조선에도 대놓고 무시당하는 굴욕을 겪는다. 더 변명하자면 본래 송이 비록 군사력이 약화되기는 했어도 [[정강의 변]]처럼 수도까지 털리고 황제가 두 명이나 인질로 끌려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송은 [[휘종]]의 실정으로 국가재정이 고갈되고 곳곳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사력까지 약화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방비책도 없이 금나라의 뒤통수를 2번이나 쳤다. [[남송]]의 [[애산전투]] 당시 황족부터 일개 이름없는 병사들까지 목숨을 걸고 몽골제국을 고전시킨 것과 달리, [[정강의 변]] 때 북송은 황제의 실정으로 재정이 파탄나고 민심도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아무도 조국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휘종]]을 검색하면 그의 치세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