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북송 (문단 편집) == 역사 == 송 태조 조광윤은 [[육조시대]] [[송(육조)|유송]](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이 宋이다)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그 일족을 [[멸족]]하던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의 황족인 시씨 일족을 보전하며[* 설정인지 진짜인진 모르겠으나 《[[수호전]]》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시진#s-1|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이 이 후손들 중 하나로 작중에서도 그 사실이 언급된다.] 우대하는 등, 상당히 인도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세웠다. 시씨 가문에 대한 은전은 [[태조(송)|태조 조광윤]]의 '''<석각유훈>'''에 따라 계속 유지되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비장했던 [[애산 해전]]으로 남송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다수의 시씨가 송 황실과 마지막을 함께 했다. <석각유훈>에 더해서 조광윤이 시씨 가문을 우대하겠다는 증거로 내려준 것이 바로 '''[[단서철권]]'''이다. 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의 [[유지원]] - [[태조(후주)|후주 태조 곽위]] - [[세종(후주)|후주 세종 시영]]처럼 찬탈과 양자 상속을 거듭해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광윤은 곽위에 비해서 매우 온건한 계승을 한 셈이었다. [[태조(송)|태조]]는 장수 시절부터 [[거란|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의 북조 전역을 완수하는 1등 공신이었으며 후촉, 남평, [[광저우시|광주]]의 [[남한(오대십국시대)|남한]]과 남부 최대의 국가인 [[남당]]을 멸망시켜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자기 대에 통일을 완수하진 못했다. 제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인 [[태종(송)|태종 조광의]]로 사서에 따르면, 태조 조광윤이 조광의에게 [[선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었다는 '''촉영부성'''의 일화는 아무리 봐도 황위 승계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촉영부성 그 자체가 조광의를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송 태종은 [[오월(오대십국시대)|오월]]과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수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부터 송나라는 약한 군사력에 발목을 잡히는데,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시절에는 통일 전쟁을 완수한 고참병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아 군사력이 우수했으나, 2차에 걸친 대요 북벌이 실패하고 요나라와의 일전에서 대패를 거듭해 군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송의 군사적 약체화를 간파한 요는 200,000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 [[성종(요)|성종]] 야율융서가 직접 친정해 파죽지세로 전주까지 밀고 내려왔다. 송 조정은 대군의 남하에 기겁하여 금릉(난징)과 성도(청두)로 천도해야 한다는 천도론이 대세가 될 지경까지 몰렸다. 당시 황제이던 태종의 아들 [[진종(송)|진종]]은 심성이 여린 군주로 유명하나, 구준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주에 친정하고 요 성종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했다. 이후 전황이 소강 상태가 되자, 송과 요는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게 되었고 요군은 철퇴했다.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의 송은 대단히 분위기가 좋았는데, 황제가 금군을 이끌고 친정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성공하고 국경 방위군으로 하여금 요군의 퇴로를 끊으려 했다. 또한 요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소달름]][* [[야율사진]]의 밑에 있을 때 [[양업]]을 생포한 요의 장수이다.]을 저격해 전사시키기까지 해서 해볼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피해 없이 황하까지 밀고 내려온 요의 20만 기마 군단은 상당한 부담이 되는 상대였기에 송과 요는 강화를 맺었다. 전연의 맹의 주요 조항은 송과 요는 형제 관계가 되며 송은 요에게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세폐로 지급한다는 것으로 요가 강력히 요구하는 영토 할양 대신에 재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구매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꾸준히 성장해 나가던 송에 새로운 대적이 생겼으니, [[탕구트]]계 민족이 세운 [[서하]]였다. 원래 송과 서하는 여러 차례 충돌하긴 했지만, 온건파인 서평왕 이덕명의 재위 기간 동안은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원호가 즉위한 뒤부터 상황이 반전해 송은 [[호수천 전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최고위급 인사인 범중엄과[* 범중엄은 서하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고 송의 통치를 받는 티벳계 민족들을 잘 위무해 명성이 높았다.] 한기를 투입해 소모전과 지연전, 청야 전술을 펼친 끝에 간신히 전선을 유지했다. 반대로 서하는 고작 10만의 병력으로 60만 이상을 전선에 투입한 송을 몰아붙였지만, 아버지 이덕명이 받던 세폐와 조공 무역이 끊겨 수많은 도시를 약탈하고도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송의 인종과 서하의 경종 이원호는 불편한 타협을 받아들이고 세폐와 조공 무역을 부활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송의 군사적 약세는 최고 지휘관 대부분이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 출신인데다[* 대표적인 예시로 [[영락성 전투]]에서 서하군과의 난전 중 전사한 [[서희(북송)|서희]]. 부장 곡진의 말을 무시하고 전투에 나섰다가 서희 본인은 물론 북송군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작전에서 장군들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일이 많아[* [[오로벌하]] 때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는데, 이는 패전의 주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패전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문제로 계속 병력을 증강해 군사비 문제가 대두하고 세폐 지급으로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전투 경험이 부족한 병력이 양산되어 송군은 강병을 자랑하는 요와 서하에 비해 크게 부족한 약군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1127년에 일어난 [[정강의 변]]으로 [[휘종(송)|휘종]]과 [[흠종(송)|흠종]]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태종(금)|태종]]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고, 남은 세력은 항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이후의 시기를 [[남송]], 그 이전은 북송이라 일컫는다. 사실상 당나라 시절까지의 북중국의 한족은 북방민족 계열이 많았으며, 문화가 가까운 요나라 및 금나라에 전부 편입되었지만 북송의 황제는 선비족 계열 지배층에서 벗어난 한(漢)나라의 직통이자 전통적인 혈연의 한족 귀족으로 그만큼 한자에 탁월했고, 오랜시간 지난 [[한나라]]와 [[위(삼국시대)|조위]] 전통의 한족 문화를 펼쳤다. 하지만 한나라 직통이라고 부르던 북송 황제의 혈연들이 여진족의 기방에 보내지는 것은 한족들에게는 매우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북송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었다. 북송은 요나라를 제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금나라와 결탁했는데, 요나라의 암군 [[천조제]]와 비밀리에 관계를 맺는 등의 신의없는 외교를 단행하여 금 태종의 침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