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송 (문단 편집) == 사회와 계급제도 == 기존 봉건적 세습과 인맥 등으로 이루어지던 관료층들이 모든 계층이 응시 가능한 과거제로 완벽히 대체되었다. 과거제 자체는 후한 시기에 개념이 제시되었고, 수나라 시기에 처음 실행되어서 당나라 시기에 제한적국소적으로 운영된 과거 선발 관료제가 실행되었지만, 절대 다수의 관료 기득권층은 귀족 계급에 세습되었다. 흔히 당나라 시기에 한국에서 상상하는 완벽한 선발 관료제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다. 일례로 당나라의 과거시험에서 655년 한해 동안 꼴랑 44명만 합격했으며, 이후 [[측천무후]]가 실권을 잡기 이전인 7년 동안 연간 평균은 매년 58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물론 측천무후 이후부터 활성화되어서 매년 수백, 수천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으나 거의 대부분은 진사 자격만 받고 지역에서 명사로 대접받는 걸로 끝이었다. '''실제 관료로 임명되는 것은 1~2%에 불과했다.''' 잘못 적은게 아니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근거로 제시하기에 어렵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도 과거제가 이상하게 돌아간 나라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과거에 합격해봤자 진사나 생원 칭호만 받고 끝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워낙 과거 급제자가 많아서 수용 한계를 넘어섰기에 명예만 주고 돌려보낸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당나라처럼 관직 대부분을 관롱집단 귀족층의 세습으로 내주느라, 남은 짜투리 하급직이나 실속 없는 계륵을 과거 급제자에게 던져준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측천무후 사후의 평균 과거제 관료 발탁은 연평균 23명에 불과했다.[[https://en.wikipedia.org/wiki/Imperial_examination#Tang_restoration|출처]] 특히 [[황소의 난]] 이후 절도사의 흥기로 정부가 마비되면서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 시기까지 합해서 측천무후 시기 이전보다 합격자가 적어졌다. 하지만 당나라는 정상적으로 정부가 기능할 때도 몇십명 중반대 수준의 발탁에 그쳤다. 그래서 [[당나라]] 시절의 [[과거 제도]]는 어디까지나 귀찮은 인재 발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로 관직에 임명시키는 것은 과거 시험과 완전히 별개로 황제 개인의 호오와 높으신 [[문벌귀족]]들이 잡일을 처리할 사람을 찾는 데 달려 있었다. 이런 [[당나라]] 시대의 [[과거제]]와 송나라 시대의 선발 관료제는 사실상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시험 합격자가 관직을 얻도록 정착시킨 것은 엄청난 개혁이자 급진적인 사회 발달이었다. 선발 관료제는 전 국민에게서 지원자를 모집하는 시험제도이다. 이를 통해 능력이 높은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의 희망자가 일상적으로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시험과목을 공부할 수 있도록 [[수능특강|교과서 · 참고서]]의 대량 인쇄가 가능해야 하고, 또 그것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유통망도 필요하다. 의욕과 재능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사전에 공부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 즉 지적·인적·사회문화적 인프라가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료의 세습을 폐지하고 지금부터는 시험의 상위합격자를 채용합니다.라고 하더라도 공부하지 않은 바보가 더 공부하지 않은 바보를 누르고 상위에 합격할 뿐이다. 그러면 국가는 파탄이 나고 만다. [[과거제]]의 전면적인 도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풍부한 종이와 진보된 [[인쇄술]]을 완비한 것은 당시의 출판 최선진국이었던 송나라뿐이었다. 이러한 혁신의 결과 수당 시기에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온 [[관롱집단]]을 와해시켰으며, 중국의 [[부르주아]]인 [[신사]]층으로 대체되었다. 더군다나 송은 아래로는 [[천민]] 계급을 폐지해서[* 그러나 송나라 이후에 들어선 [[명나라]] 때부터 악호(樂戶),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들이 다시 생겨났다. 이들이 생겨나게 된 유래는 [[원나라]]가 절강을 점령한 이후 남송 백성들을 징벌하여 육지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나 아니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자신의 적수인 장사성의 부하들에게 대대로 타민이 되어 배 위에서 살아가라는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 악호는 원래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기 위해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건문제 편에 섰던 관리의 후손들인데 영락제가 승리하자 그들의 자녀들이 교방사로 끌려가 악호나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타민들은 나중에 육지에 사는 것을 허락받기는 했지만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타민들은 글을 읽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권 248~250쪽] 진정한 황제 밑의 평등을 이룩하게 된다. 이전 당나라에서 범죄자와 외국인을 제외한 자유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긴 했으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파는 행위와 외국인과 소수민족의 노예화를 허용하면서 사방에서 대놓고 북새통을 이루는 노예 거래와 노비 세습이 이뤄져 다른 노예제 합법 중세국가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에서는 사회 구조 자체를 재편해, 노예 매매 자체를 불법화하고, 자유인이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거나 스스로 노비로 전락한다는 노예 무역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실태를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시켰다. 오직 범죄로 인한 노예화만이 인정되었으며[* 다만, 오늘날에도 범죄자의 강제노역 즉, 징역은 전세계 보편 사항이니 이걸 노예라고 함은 애매하다. 애초에 당시에도 이들을 노예라고 부르지 않고, 노비라 일컬었다], 그러한 케이스도 노예 거래가 불법이니, 관아의 재판 기록으로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라고 위조하는 행위가 상당히 힘들어졌고, 송나라 이전 시기나 원나라 등 이후 시기에 보통 노예였던 종과 머슴들도 금전 고용 거래 관계가 일반적 관행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수-당은 균전제로 대표되는 정부의 가혹한 [[징용|무급 강제노역]]과 동원을 위해 [[양인]]조차도 엄격하게 토지에 인신을 묶는 구속을 당했고, 비단 일상적인 노역과 징병 외에도 농지에 인신이 묶여 대대로 태어난 땅에서 농사가 강제되고, 농지가 정부에 철저히 통제된 상황인만큼 소출마저 손쉽게 정부가 파악해서 빈번한 추가세금으로 갈취당하던 상황이였다. 실상 당나라의 양민은 국가의 [[농노]], 심하게 표현하면 공노비였다.[* 이러다보니 말기에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노역과 세금을 견딜수 없었던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도주하는 일이 흔하게 발생한다.] 반면에 송나라는 [[균전제]]를 폐지해 구 천민과 노비들부터 토지에 묶였던 양민들까지 예외없이 국경내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졌다. 운신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무시되어왔던 직업선택의 자유 및 [[재산권]]의 보장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송나라 시대의 사유재산권은, 근현대적인 개념에서의 사유재산권과는 거리가 다소 멀었다. 요컨대 근현대식의 사유재산권이란, 개인이 자신의 물건에 대한 극도의 배타성을 가지고 그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전권을 행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런데 송대에는 [[소작]]제도에 따른 경작권이 통용되었다. 사실 근현대 사회에서 경작권이라는 개념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근대 국가에서는 토지의 소유권과 사용권이 명확히 분리되기에, 일물일주(一物一主)의 원칙에 따라 토지의 이중매매를 용납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때에도 사유권이 엄연히 존재하고 법률을 통해 보장되었지만, 그것이 근현대식 개념의 재산권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중화제국]]의 토지 소유 제도는 송대를 지나 명대의 [[일조편법]], 청대의 [[지정은제]], 그리고 개항 이후 각종 서구화 개혁을 거치며 점점 근대적인 성질을 갖추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물류와 상업과 공업의 급진적인 발전을 불러왔고, 농업조차 탁장행정식 모순인 균전제식 농지분할로 인한 비효율이 사라지고 미개간지 개간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추정인구수 9세기 당나라 5~6천만명이 12세기 송나라 1억2천만으로 2배 폭증했다. 전한기 인구수추정치가 5700만명이 다수설이니 당나라까지의 800년동안 인구수가 정체 퇴보했다. 북위~당나라기 균전제가 그만큼 농업에 해로웠다.[* 오-동진-유송-남제-양-진의 육조시대부터 수~당 육백 년 동안 상전벽해에 가까울 만큼 강남지역 개발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균전이 정부의 행정력 투사가 용이한 북중국, 다시 말해 강북지역에 설치되어서 북부가 그 폐해를 크게 입었기 때문에 상쇄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황건적-군벌난립-삼국-위진-오호십육국의 개판이 있었으니 관대하게 이 시기를 빼면 600년이긴 하나.. 그런식으로 따지면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오대십국으로 송나라도 할 말이 많다.] 육조시대에 한족 난민의 유입으로 급작스럽게 개발이 이뤄졌으나 수~당 시기 균전에 북중국의 인력이 묶여서 농토개발이 지지부진해진 강남지역이[* 그래도 수양제의 대운하와 해상실크로드로 인한 물류-상업의 발달로, 수당기 지지부진한 강남 농지개발과 달리 물류요지를 따라 강남의 도시는 발전했다.], 균전제가 붕괴해 난민이 쏟아지던 [[오대십국]]과 인력이동이 자유로워진 송에 다시 급진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강북지역의 경제력을 능가하였다. 연운16주와 서량-오르도스를 각각 요나라-서하에 빼앗기고, 자연방어선이 없어 성채-인공호수 도배 무인지대 설정으로 북중국의 국토사용이 제한되었음에도, 도리어 당나라에 비해 송나라기 강북인구가 증가했다. 군대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고, 강제동원 무급노역은 자발적 유급 고용제로 변했다. 급진적인 민권신장만이 아니라, 폭발적인 민간경제의 활황을 불러왔다. 단 유급고용은 신법으로 인한것으로 왕안석 실각후 구법당에 의해 강제노역 제도가 부활한다. 그렇다고, 노역은 당이나 송이나 거기서 거기가 절대 아니다. 당나라기 균전제는 일개 제도 따위가 아니라 행정과 국방과 경제와 사회등 대부분의 제도의 전제조건이자 바탕이었다. 그 탓에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등 균전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당나라의 조세 및 인력 동원 제도가 급격히 쇠퇴하여 마침내 붕괴에 이르렀다. 동원을 극대화하기 위한 당나라의 국체에 따라서 강제노역은 만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였다. 당나라의 강력한 대외국력투사 화려한 모습 이면에, 양민의 강제노역과 징병을 효율적으로 쥐어짜는 어둠이 있었다.[* 하지만 균전제는 미성숙한 수당기 관료제의 한계에서 행정력을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묘책이기도 하다. 중원은 자연방벽 없이 광활한 유라시안 스텝에 둘러싸여 있어, 지구상의 어느 지역보다 기마민족의 압력이 심대하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섬나라이거나, 고대말-중세초를 제외하면 기마민족으로부터 자유롭던 서유럽, 하다못해 대초원과 닿는 면적이 좁고 무수한 자연방어선이 겹겹히 쌓여져있으며 자연방어선을 넘을때마다 정주화-현지문명 수용도가 높아지는 거름망으로 기능해 온 중동~동유럽이라면 몰라도, 당 왕조에게 제민지배란 생존을 위해 필수로 갖춰야 하는 요소였다. 자연국경선도 없이 수 천 킬로미터로 활짝 열린 국경선을 근대의 전차군단에 비견되는 기동력을 가진 기마민족으로부터 지키려면 ''최소한의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수십만 명의 장정을 [[상비군]]으로 유지하고, 유사시에 수십만명을 추가로 징집할 동원력이었다. 그래서 유럽이나 서아시아 및 인도, 혹은 일본처럼 소수 정예 엘리트 군사집단에 포커스를 둘 수 없었다. 기마 민족 입장에서는 한 줌의 정예병을 무시해버리고 후방으로 침투해서 파죽지세로 국토를 점령해버리면, 중국의 정예병들은 유지비용을 지불할 물자공급에 차질이 생겨서, 오합지졸로 전락하여 와해되기 마련이었다.] [* 즉 균전제는 경제 및 기술의 발전을 깎아먹는 동시에 당장의 동원력과 세수를 몇 배로 뻥튀기하는, 부작용 대비 효과가 좋은 방책이었다. 당장 힘이 없어 국경을 못 지키면, 단순히 사회발전을 깎아먹는 이상의 [[오호십육국]]식 문명 후퇴를 한꺼번에 맞을 수 있다. 실제로 당나라는 그 무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초원에서는 강대한 [[돌궐제국]]을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나마 몽골고원을 장악해 총독부를 세웠다. 또한, 예상 불가능하게 등장한 강력한 외적인 [[토번제국]]을 ([[안사의 난]] 이전까지는) 역으로 밀어붙였다. 이처럼 당나라는 [[중화제국]] 역대 왕조 중 외적의 압박에 가장 성공적으로 대처해냈다. 부병제에 기반한 군사력으로 [[타림분지]]를 넘고, 트란스옥시아나까지 넘어서. [[박트리아]]까지 진출해 [[실크로드]]를 쥐는 데 이르렀다. 나아가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과 서역 학문과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균전제로 희생된 발전을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물론 [[안사의 난]] 이후에는 [[도호부]]든 [[실크로드]]든 모두 물거품이 되긴 한다.] 송나라는 유교가 국본이라 노역에 부정적이었고, 또 행정관료의 견제와 감시를 받아 노역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균전제를 포기한 만큼 제민지배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당나라급 동원력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송나라가 진일보한 관료제를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광활한 중국대륙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인구를 균전제처럼 통제할 수는 없었다. 즉 당나라처럼 만연한 노역을 부리려고 해도 역량이 부족했다. 일본의 교토학파가 괜히 남북조-수당시절을 중세로, 송나라를 근세-준근대로 보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탈봉건적이나, 송나라에서는 재상중심제의 운영으로 황제가 법치주의의 구속을 받도록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조차 군주는 법을 초월한 존재이며 백성을 오직 법에 의해 다스려야 한다는 이념에서 그쳤는데도 말이다. 어사 유불은 >"천하의 일은 천하가 함께 해야 한다.군주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사 방정실은 송 고종의 면전 앞에서 >"천하는 중국의 천하입니다. 조종의 천하입니다. 군신, 백성, 삼군의 천하입니다. 폐하의 천하가 아닙니다." 재상 두범은 >"천하로서 천하를 삼고, 개인으로서 천하를 삼지 않는 것이 만세를 지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다" 성리학자 서의는 송효종에게 상서를 올려 >"만일 군주가 성인이면 신하는 멍청이다. 폐하는 누구와 공명을 함께 하시겠습니까?" 성리학자 정희도 황제의 면전에서 >"천하를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는 재상에게 달려 있으니, 군주의 덕으로 성취를 경연에서 꾸짖으십시오" 라고 말하는 등 일부 위험 분자의 사상이 아닌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이상적인 사회상이 모두의 천하이고 모두가 함께 다스린다는 "공천하" "공치"의 이념이 주류를 이뤘다. 비록 이러한 구조를 명백하게 법률로서 못 박아 놓은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권력의 분화와 견제, 합의에 의해서 운용되는 체제였다. 이를테면, 송 인종이 인사권을 행사하려고 조서를 독단적으로 내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재상이 손수 반려함으로써 한 가지도 실행되지 않았다.[* [[영국 국왕]] 역시 성문법대로만 하면 [[대헌장]]과 [[권리청원]] 및 [[권리장전]]에 명시된 금지 사항들을 제외하고 여전히 [[중세]]~[[절대왕정]] 시절 가졌던 왕권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아직까지도 군대 통수할 수 있고 국회 해산할 수 있고 총리 지명할 수 있고 법률안 거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정착된 [[의회]][[민주주의]]적 [[관습법]]에 따라 왕권을 반강제적으로 남발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송나라 천자의 정치적 역할 또한 신료들과의 묘한 타협에 의해 관습적으로 규정되어온 결과물이다.] 중서성이 행정부, 재상이 정부수반(총리), 황제가 입헌군주제의 군주 내지는 의원내각제의 대통령 역할을 담당하는 [[삼권분립|매우 근대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여기에 계급간의 평등까지 고려하면 지주와[* 독일의 융커는 19세기까지 다수의 농노와 영지를 거느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다. 이들은 토지를 매매하면서 거기에 딸린 농노의 소속을 패키지로 변화시켰다. 농노는 [[장원]]에 예속됨으로써 경제적 구속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융커 출신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젊은 시절 자신의 농노를 무장시켜 독일 의회를 공격하려 했듯이 인신적 구속 또한 받고 있었다. [[http://cafe.daum.net/shogun/1Db/5603|#]]] 군부의 전횡이 판치던 [[독일 제국]]은 물론, 계급제 사회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빅토리아 시기 [[대영제국]]보다 나은 점이 많다.[[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813|#]] 그래도 송나라의 시스템을 [[공화주의]]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왕안석]]의 신법당과 [[사마광]]의 구법당의 정치적인 대립에서 보여지듯, 송나라의 정치는 황제를 보필하는 유학자들이 주도했으며, 근현대의 유럽처럼 유산시민계급의 참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유학을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관료 중 유산시민계층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 모두가 대농지를 거느리고 인신을 구속하는 봉건 사회의 지방 유력자라는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따라서 송나라의 정치제도는 [[국왕]]과 [[사대부]]층이 주도하는 [[조선시대]] 내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제국]]과 유사하며, 근대 유럽보다 나은 점이 많다는 주장은 지나친 수정주의적 시각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