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양군벌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순승왕부회의.jpg|width=100%]]}}}|| || 1916년 순승왕부에서 회의를 마친 위안스카이와 북양군벌의 실력자들 ||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나라 말기의 실세 [[이홍장]](李鴻章)까지 이르지만 실질적인 시초는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가 조직한 신군[* 위안스카이가 조직한 신군을 북양군이라고 한다.] 세력이다.[* 참고 [[https://tanukiknowledge.tistory.com/3]]] [[양무운동]]과 [[청일전쟁]]을 거친 신군 세력이 북양군벌의 중심이었고,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오히려 [[선통제]]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독재 권력 강화의 든든한 군사적 뒷받침이 되었으며 위안스카이는 이를 바탕으로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의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맞서 1913년 국민당이 [[계축전쟁]]을 일으켰지만 간단히 진압했다.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단행되었고 1915년에는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를 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15년 12월 25일, [[운남성]]에서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리례쥔]]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켜 맞섰고 열강이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상당수의 북양군벌들도 위안스카이에게 등을 돌려 제제 취소를 요구하거나 급기야 독립과 위안스카이와의 단절을 선포하였고 충격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다. 이후 대총통 자리는 부총통 리위안훙이 계임했으나 위안스카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북양 군벌은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처음에는 국무 총리 겸 육군 총장 [[돤치루이]]를 중심으로 하는 [[환계]]가 권력을 잡았으나 1916년부터 그의 기세를 우려한 리위안훙이 펑궈장과 연계하여 돤치루이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로 [[부원지쟁]]을 벌였고 1917년 [[장훈복벽]] 이후 돤치루이가 [[량치차오]]와 연합하여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환계의 권력 확대 수단으로 무리하게 이용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반감을 샀다. 결국 1917년 쑨원이 [[탕지야오]], [[루룽팅]] 등과 합작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자 [[호법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환계는 [[봉천군벌|봉계]]와 동맹을 맺었으나 쉬수정의 전횡으로 동맹은 결렬되었다. 결국 1920년 봉계와 직계가 동맹을 맺었고 1920년 7월 [[안직전쟁]]에서 환계가 패배하면서 패권은 직계와 봉계의 연합이 차지하였다. 이후 직계와 봉계의 사이가 악화되면서 1922년 봉계와 환계가 연합하여 [[1차 직봉전쟁]]을 일으켰으나 직계가 다시 승리했다. 하지만 장쭤린이 군의 현대화와 정예 장교 육성을 통한 와신상담을 통해 1924년 [[2차 직봉전쟁]]으로 다시 승리. 환계, 봉계, 풍계의 연합이 직계를 패퇴시키고 패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풍계의 지도자 [[펑위샹]]과 장쭤린, 돤치루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925년 직계 쑨촨팡이 우페이푸와 연합, [[손봉전쟁]]을 일으켰고 장쭤린 산하의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켰다. 1926년에는 펑위샹이 옌시산을 침공하면서 직계, 환계, 염계가 연합하여 펑위샹을 공격하는 [[직봉풍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펑위샹은 패배하여 소련 외유를 떠났고 장쭤린이 다시 중국 천하를 장악하는 것을 목전에 두었다. 그러나 1926년 광저우 국민 정부가 북벌을 선포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장제스는 먼저 직계의 [[우페이푸]]와 [[쑨촨팡]]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북양군벌들은 직계, 봉계, 환계를 가리지 않고 연합하여 장쭤린을 대원수에 추대하여 맞서려 했으나 국민당은 내부 분열에도 불구하고 결국 풍계, 염계 등을 제때 산하 세력으로 끌여들여 1928년에는 베이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만주로 퇴각하던 장쭤린은 1928년 6월 [[황고둔 사건]]으로 일본군에게 암살당했고,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다나카 기이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합작을 결정하면서 북양 군벌은 실질적으로 소멸되었다. 물론 개별적으로 국민 정부 산하에 가담한 북양 군벌의 계파들은 잔존했으나 다시는 북양 군벌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나마도 1929년 ~ 1930년 사이의 [[반장전쟁]]에서 광탈하면서 몰락하거나 지역 군벌로 남았다. [[중원대전]] 때 [[장제스]]의 편을 들어 국민정부의 2인자에 오르게 된 [[장쉐량]] 역시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으로 몰락하면서 북양 군벌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