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진통일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이승만북진.jpg|width=100%]] || || 북진통일을 주창하는 이승만 대통령 || 한때 [[대한민국]]에서도 특히 [[이승만]] 정권 때에 [[6.25 전쟁]] 이전부터 북진통일이라는 슬로건을 열심히 내걸었다. 특히 한국 전쟁 중에도 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로 북진통일 궐기 캠페인을 끈질기게 벌였다. 수도를 [[군사분계선]]에서 가까운 [[서울특별시]]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계속 유지한 것도 이 당시에는 북진통일이 곧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시절의 북진통일론은 월남한 사람들의 통일 열망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남북의 국력 차이와, 미군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고 1953년에 체결된 한미방위조약에서 무력을 통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금하고 있기에 북진통일은 현실적으로도 명백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북진통일론은 평화통일론 등 다른 통일 운동 논리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대중을 동원한 각종 궐기대회나 시위는 영도자 중심의 비상 결속 체제를 유도하고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강화하고 극우 반공 체제를 공고히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북진통일 운동은 이승만 정권 붕괴 시까지 계속되었지만,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와 그 이후에는 정치적 효력이 약해졌다. [[1950년대]]에는 분단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살벌한 북진통일론에 압살되어 어떠한 다른 통일론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 정권은 위에서 말한 대로 휴전이 임박한 1953년 3월 말부터 대중 동원을 통해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궐기대회와 시위를 벌이는 한편 1954년에는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이 불거졌고, 1955년 8월부터 연말까지 적성국/중립국 감시 위원단 축출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이에 죽산 [[조봉암]]이 북진통일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공약 10장'을 펴서 극좌/극우세력을 억제한 진보세력 주도 하에 유엔 보장에 따른 평화통일을 이루는 '평화통일론'을 들고 일어났으나, 1958년 1월 터진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된 조봉암이 이듬해 사형을 당함으로써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북진통일의 개념은 약화되고 다시 평화적 통일이 대두되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가자 판문점''이라는 슬로건으로 통일 운동이 일어난 셈. 그렇지만 얼마 안 있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이후부터 반공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승공통일(勝共統一)이라는 구호로 북진통일 이념을 사실상 계승하였다. 특히 [[1.21 사태]]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반공운동이 절정에 이르렀고 멸공통일 이념은 더욱더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자 전환점을 맞는다. 남북간의 상호접촉이 일어나고 화해무드로 변화하면서 민족적 통일의식이 올라갔고 남북한 모두 공식적으로 전쟁무력의사를 표방하지 않음에 따라 멸공통일 또한 지양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신 헌법]]에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 항목이 추가되자 정부 또한 북진통일 이념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1990년]] [[동서독 통일|독일통일]]과 [[예멘 통일]][* 평화합의통일을 선언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남예멘 반란으로 북예멘이 무력 공격하면서 통일되었다.]도 평화적인 통일을 이룸에 따라 통일의 무력수단 방안은 더 약화되게 된다. 북괴군 수뇌부가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남한을 선제 공격하지 않는 이상, 한국군이 명분없이 직접 북진하는 시나리오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서는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고, 북한 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평화통일이 좌절되었을 때에는 통일을 위한 플랜B로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고 만약 북한이 연평도 포격처럼 한국에 군사도발을 하여 민간인 사망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6.25 전쟁을 다시 시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