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점유 지역과의 비교 ==== 북한은 한반도를 점유한 영역이 한국보다 넓은데 인구는 잘 쳐줘봐야 2500만으로, 5100만 인구를 가진 한국의 절반이나 겨우 따라잡는 상황이다. 또한 북한의 도시는 현재 인구 300만 정도의 [[평양시|평양]]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광역시는커녕 인구 85만명의 [[청주시|청주]]보다 큰 도시도 없다. 북한의 적은 인구수는 앞서 말했듯 북한 국토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험한 산지같은 지리적 문제도 분명히 원인 중 하나지만 6.25전쟁 역시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도시 규모의 경우 이동통제 정책과 경제난 및 빈곤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각의 인식보다는 현재의 북한에도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인구가 살았다. 조선 후기 정도 되면 조선 8도에서 평안도는 두 번째로 인구가 많았고[* 다만 이는 평안도의 엄청난 면적 덕분도 있다.], 함경도는 충청도에 육박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33_0020_0010_0020|함경도는 정말 인구밀도가 낮지만, 평안도와 황해도는 경기·충청·전라·경상 급은 아니더라도 강원도보다는 높았다.]] 평안도의 경우는 해안 지대의 기름짐이 충청도 수준이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846&code=kc_age_30|#]] 강원도를 제외한 남한급 인구밀도를 가진 멸악산맥을 뺀 신의주-포항 이남의 북한쪽 면적은 전라도와 비슷하다. 여기다가 일제의 병참기지 정책으로 공업화가 남쪽보다 빠르게 진행된 덕분에 당시 한반도의 가장 큰 도시 10개 중 6개가 이북에 위치했다. [[평양시|평양]]은 [[부산]]보다 인구가 조금 더 많았으며 [[청진]], [[함흥]], [[흥남]], [[신의주]], [[원산]]은 [[광주광역시|광주]]보다 큰 도시였고 특히 [[청진]]은 [[대구광역시|대구]]와 맞먹는 인구 규모를 갖고 있었던데다가 [[흥남]]을 흡수한 현재의 [[함흥시]]를 고려한다면 당시 함흥과 흥남을 합친 인구수는 [[대구광역시|대구]]와 [[인천]]보다도 많았다. [[해주]]와 [[남포시|남포]]는 [[대전광역시|대전]]보다 큰 도시였으며, [[개성시|개성]] 역시 대전과 동급의 인구 규모를 가진 도시였다. 하지만 6.25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의 인구는 꾸준히 감소했는데, 1950년 55만명, 1951년 54만명, 1952년 51만명, 1953년 31만명이 감소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1954년에도 8만명이 감소했고 1955년에서야 6만명이 증가, 1956년에는 16만명이 증가하였으며 1958년부터 안정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6.25전쟁당시 국군과 UN군이 한창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닿은 직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일어났고, 그 여파로 이북에서 인구가 밀집된 거의 대부분의 지역[* 신의주와 강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 대도시가 당시 국군에게 수복되었으니 말 다했다.]에서 피난행렬이 이어졌다. 즉, 압록강까지 닿아있던 전선이 다시 아래로 쭉쭉 밀리면서 전선 이남에 있던 북한 주민 상당수가 남쪽으로 함께 밀려내려온 셈이다. 황해도 사람들의 경우 주로 서해 5도 및 강화도와 인천에 정착했고, 평양 및 평안도 사람들은 주로 경기도와 전라도, 함경도 사람들은 속초 등 강원도, 혹은 흥남철수 등을 통해 배를 타고 부산, 경남에 정착했다.[* 물론 북한도 [[낙동강]] 근처까지 내려온 적이 있지만 전선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중간에 허리가 끊기는 모양새로 한반도 이남을 포위하듯 형성되면서 피난민이 이북으로 밀려나듯 이동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시간상으로도 1.4후퇴 이전이므로 의미가 없다.] 또한 자발적으로 월남한 경우도 많았다. 북한 치하가 공산주의 치고도 숙청과 수탈이 심하여 도저히 살만한 곳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실향민인 [[김형석(교육자)|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북한이 점령한 고향 평양은 차라리 일제 정도였다면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식인은 사회활동을 강요하며 정권에 복종하지 않으면 숙청시키는 살기 힘든 곳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고[[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821/85904875/1|#]]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인 [[문용형]] 씨도 북한에서의 트라우마로 공무원을 하려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국군이 38선 이북을 점령했을 때 그 주민들의 협조적인 태도는 추후 북한 정권을 긴장시켰으며, 이게 다 미국이 주입한 독소 때문이라며 남탓을 하기에 바빴다. [[https://repo.kinu.or.kr/handle/2015.oak/666|#]]] 덕분에 휴전 직후 남한 인구는 오히려 전쟁 직전보다 증가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도 북한이 더 많았다. [[https://www.yna.co.kr/view/AKR20150624129751043|#]][[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67439|#]] 전쟁 후 북한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여 이사조차 어렵게 만들어 도시의 인구 성장이 매우 더뎌졌다. 1945년 전 도시화율이 휴전선 이남보다 높던 북한은 80년대에 들어서는 한국에게 도시화율이 밀리며, 인구 100만이 넘어가는 도시는 고작 평양 하나 뿐인 상황이 되었다. 한반도 이남에 위치한 대도시들은 전쟁 이전 당시와 비교하면 현재 최소 10배 이상 불어난 인구를 가진 반면, 북한에 남게 된 도시들은 [[평양]]을 제외하곤 많아봤자 5배, 대부분 2배를 겨우 넘긴 곳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평양]]은 수도 버프를 받아 10배 정도 성장했으나 그마저도 지금 [[부산]]의 인구에 밀려 한반도 3위로 내려갔으며 [[인천]]에게 따라잡히기 직전인 상황에 놓여있다. 충청도 인구 550만명의 약 26%인 145만명이 대전광역시에 집중되어 있는데, 대전과 비슷한 지리적 요건을 가진 황해도 [[사리원시|사리원]]이 대한민국의 실효지배 하에서 발전했다면 황해도 인구 400만명의 약 26%인 104만명 정도의 인구를 가질 수도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 북한의 사리원시는 30만명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이다.]. 함경도의 전통적인 최대도시 함흥의 경우 흥남까지 흡수한 뒤 인구 250만이 좀 안 되는 대구 정도의 큰 도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인구 300만을 주장하는 [[평양]]과 인구가 거의 100만에 근접한 [[남포]]도 거품이 많이 낀 수치인 것이, 이 두 도시의 범위가 비정상적으로 넓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 상 '평양직할시'의 면적은 '''서울특별시 면적의 무려 3배'''로, 사실 현실적인 평양 시가지에다 주변 지역들을 죄다 억지로 갖다 붙인 것에 가깝다. 한국으로 치면 성남, 과천, 의왕, 안양, 광명, 부천, 고양, 의정부, 남양주, 구리, 하남을 전부 서울에다 포함[* 이렇게 되면 서울 면적이 기존보다 3배로 늘어나 현재 북한의 평양직할시와 엇비슷해지며, 인구는 약 1450만명으로 기존보다 1.5배 뻥튀기 된다.]시켜버린 셈이다. 즉, 실질적인 평양 시가지[* 중구역, 평천구역, 보통강구역, 서성구역, 모란봉구역, 대동강구역, 동대원구역, 선교구역]의 인구는 2008년 자료 상으로 300만의 절반 수준인 148만명 정도[* [[대전광역시]] 정도의 규모]밖에 되지 않는다. 한 때 부산보다도 큰 한반도 제 2도시였던 과거가 무색해지는 수준이다. 남포 역시 2010년에 포함된 주변 지역을 빼고 실질적인 '남포 시가지'의 인구는 고작 37만 가량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