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경제/역사 (문단 편집) == [[1990년대]] 초반 == >[[김일성]](金日成)은 생전, 아침에 일어나면 [[평양]] 하늘부터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다. 평양 화력발전소 굴뚝을 쳐다보는 것이다. 높게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 나오면 김일성 기분은 최고다.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겠구먼』 하곤 했다. > >그런데 92년 4월 아침 김일성 기분은 최악이었다. 두개 굴뚝에서 하얀 연기만 몰몰 올라오는 것이다. 알아보니 안주탄광에서 석탄공급을 안해줘 터빈을 못 돌리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김일성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로동신문]]은 매일같이 「석탄 생산 1백20% 초과달성」을 보도하고 있지 않은가. >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충직한 서기 하나를 조용히 불렀다. > >『너 조용히 안주 탄광에 내려가 봐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안주탄광으로 내려온 서기는 갱옷으로 갈아입고 대뜸 막장으로 내려가봤다. 어두컴컴한 막장에는 광부 서너명이 쪼그리고 앉아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동무들 왜 탄은 안캐오.』 광부들이 한심하다는듯이 되물었다. 『넌, 누구야.』 『제대 군관인데, 오늘 배치됐소.』 답답하다는듯이 한 광부가 쏘아붙였다. 『이 사람아, 탄을 캘 힘이 있어야 캐지.』 광부들은 며칠째 밥을 못먹은 것은 물론 도시락도 싸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그저 막장에서 시간만 때우고 가는 것이다. > >원래 북한에서 광부는 특별 영양식을 배급받게 돼있다. 양곡 1천1백g, 고기 2백g, 콩기름 1백g 정도다. 규정대로라면 상당히 잘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며칠째 멀건 소금국만 먹은 것이다. 창고에 가보니 양곡이 하나도 없다. 그나마 고기가 조금 공급됐는데 간부들이 중간에서 다 해먹었다. > >평양으로 올라온 서기는 이같은 사실을 낱낱이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김일성은 크게 놀랐다. 「배급이 안된단 말인가」하고. 당시 김일성은 배급을 주는지, 못 주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 상태가 이렇게나 좋지 않은 것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안 되어 보이겠지만 사실 김일성 뿐만이 아니고 독재자들이 다 이렇다. 사람은 웬만하면 듣기 좋아하는 보고만 받고 싶고 독재자쯤 되면 듣기 싫어하는 보고를 쳐내거나 그런 보고를 올린 사람을 짜르는 일은 쉽고 또 그 정도면 주변 사람들이 아부하기 위해 알아서 듣기 좋은 보고만 올릴 수 있다. 그럼 그 결과 독재자는 듣기 좋은 보고만 들으면서 점점 현실감각이 떨어지게 된다.][* 당장 이 글에서도 보이다시피, 본인이 어용화시킨 [[로동신문]]의 듣기 좋은 보도에 본인이 속아넘어간 셈이다. 물론 로동신문이 언론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완전한 선전 수단으로 되어버린데에는 김일성의 책임이 크다는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적어도 80년대부터 김정일에 대한 후계자 과정이 진행되어 90년대 쯤에는 실권은 김정일이 가지고, 김일성은 외국수반이 오면 접견을 해주는 상징적인 국가지도자 정도의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김정일이 불리한 보고는 김일성에게 올라가지 못하게 해서 실상을 나중에 알게 된 김일성이 격노했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김정일은 건강문제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었다. ] >----- >탈북민 [[강명도]] 씨의 [[https://www.joongang.co.kr/article/3053921#home|증언]] 중에서. 이 시기부터 북한으로서는 여러 가지 불길한 징후가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소련의 붕괴와 그에 따른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붕괴로 인해 북한제품을 수출할 창구가 사라졌고, 중국마저 덩샤오핑의 주도로 개혁개방이 실질적으로 체감[* 사실 북한의 주된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가 일본 물품을 사서 중국에 파는, 일종의 밀수형 중개무역이였다. 바로 위에 나온 [[강명도]] 씨가 한 [[https://www.joongang.co.kr/article/3045981#home|일]]이 바로 이런 일로 일본 중고차를 사서 중국에 파는 일이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문호를 열면서 돈줄은 돈줄대로 줄어들고 정치적 입지도 정치적 입지대로 곤란해진 것. 심지어 중국도 남한과 1992년 한중수교를 맺으며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다.]이 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1989년에 폴란드 첫 자유총선에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가 압승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이루어지면서 북한 경제는 침체기에 빠진다. 다만 이 시기에도 기존에 비축하고 있던 외화로 원료나 상품을 해외에서 구입해 오는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생활난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주요 교역국들이었던 소련과 그 위성국들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거치면서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에 러시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는 물가상승률이 수천%에 달해서 예금이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리던 시절이었고,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일선 공장은 물론이고 학교에서조차 월급을 지급할 돈이 없어 보드카나 속옷, 소시지, 화장지, 화장품 따위를 월급이라며 대신 지급하던것이 현실이던 한심했던때였다. 이러한 광경은 9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정상적인 교역이 이루어지지 [[https://news.joins.com/article/2650387|못했으며]], 이에 따라 산업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생산재의 수출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히 수많은 공장들이 멈추었고 외화를 획득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 경제는 극심한 침체에 빠진다. 완곡하게 원자재 수입이라고 표현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북한은 석유의 상당 부분을 소련으로부터 '''국제 시세보다 훨씬 싼 '우호 가격''''에 결제는 북한산 광물·기계류·경공업 제품으로 해서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90년 한소수교와 1991년 소련해체로 석유수입이 일순간에 끊어진 것이다. 구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의 석유 회사들은 국제 시세에 따른 경화(현금) 결제를 [[https://news.joins.com/article/2525379|요구]]했지만, 망조가 들은 북한으로서는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북한은 이 시절의 석유 수입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거기에 수출도 말이 좋아 수출이었지, 사실상 광물이나 저질의 상품을 소련과 동구권에 떠넘기고 북한이 스스로 생산하기 힘든 고급 제조설비와 공산품과 원료(특히 석유!)를 받아오는 수준이었으며, 그나마도 (북측이) 납기나 품질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시 북한 무역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http://egloos.zum.com/sonnet/v/4313028|이곳]]을 참조. 결국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그냥 퍼주기[* 탈북 외교관인 [[고영환]] 씨의 저서 <평양 25시>에 따르면, 가령 경공업부문에서는 원료공급을 매번 [[김복신]] 당시 부총리가 소련 당국자들에게 [[구걸|신묘한 수완]]을 발휘해서 원료를 뜯어오는 식으로 해결해왔다고 한다. 소련 측에서는 자기들이 내주는 것의 반만이라도 돌려달라고 화도 내보고 사정도 해봤지만 결국은 원료를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다른 부문들도 사정은 대강 비슷했다고 한다.]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 북한은 언제나 [[자력갱생]]과 민족자립을 외쳤지만, 실상은 동서[[냉전]]과 [[중소결렬|공산권의 분열]]을 이용해 [[제2세계]]에서 뜯어낸 원조로 경제를 유지했던 것이고, 이 구도가 무너지자 곧바로 북한경제도 따라 무너지고 말았다. 이미 1987년부터 진행중이던 제3차 7개년계획 초반부터 성장률이 점점 떨어져 1990년대 초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입했다. 여하튼 북한 정권은 민심 안정을 위해서 식량공급에는 최선을 다했고, 경제위기 타개책으로 대외 경제교류 정책을 적극 추진코자 했다. 그러나 이것도 사회주의 체제를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했기 때문에 중국식 개혁개방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김일성은 대외무역을 확대하고 세계 각국과 경제/기술협조를 활발히 하라고 지시하여 '경제특구 설치'라는 조치가 강구됐다. 1991년 12월 함경북도 라진/선봉 지역을 중계무역과 수출 가공, 관광 등 국제교류 거점으로 하고자 '경제특구'로 선포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외국인투자법과 합작법 등 수십여개 법률들을 단계적으로 제/개정했다. 그래서 일단 [[1992년]]~[[1993년]]경까지는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연료부족으로 정전이 발생하고 열차가 지연되거나 저금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통장 잔고를 아예 못 찾는 현상이 심해지는 등[* 80년대에는 돈을 "한번에 다"는 아니더라도 일단 찾을 수는 있었다고.] 경제난이 체감되기 시작했고, 라선 경제특구 프로젝트도 같은 시기 내부적으로 불어닥친 경제난에 대북 투자를 주도할 한국 및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별 성과가 없었다. 이 상태로 1993년 12월 8일에 북한 당국은 제3차 7개년계획이 실패했다고 공식 인정했고, 1994~1996년까지 완충기를 설정하며 농업-경공업-무역 3대 제일주의를 선포하여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으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과 동시에 나라 전체가 마비되면서 '[[계획경제]]'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세의 지옥도가 열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