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경제/역사 (문단 편집) == [[1960년대]] == 1950년대 후반 [[중소결렬|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자]], 북한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양쪽과 적절히 거리를 두며 양쪽 모두로부터 이득을 챙기는 외교 정책을 구사한다. 즉, 선진 기술과 산업을 갖춘 소련으로부터는 설비와 기술을 도입하고, 공업이 아직 발전하지 않은 중국으로부터는 원자재나 식료품을 들여왔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광풍이 부는 와중에도 북한은 우회적으로 이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 움직임을 보이며 66년에는 [[주체사상|사상적인 독립]]을 꾀하고, 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 때도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을 택하면서 양국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만 챙기는 정책을 택한다. 또한 60년대부터는 기초 과학 분야와 최신 산업 기술들을 단순히 전수받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술로 체화하는 과정을 들어서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돈이 안 되는''' 학문의 육성에 인색하지 않은 것은 과학 분야에서는 장점이라고 한다. 특히 방위산업 기술 이전과 직접생산면에서 한국이 미국에게 받은 대우와는 정반대. 남한의 경우에는 1970년대에 과학 기술 인재의 싹을 육성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첨단 과학 기술 개발에 뛰어든 것을 생각한다면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상당히 빠른 것이었다. 여기에 북한은 50년대에 기초를 닦은 중화학 공업의 기반을 바탕으로 경공업 발전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시기까지는 북한 정권 내에서 선군노선이니 군수공업이니 하는 주장을 하는 세력이 그렇게까지는 우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민간 경제 부문의 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하튼 이때까지 북한의 1인당 GDP는 대만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대만과 비슷한 궤도로 경제성장을 했다. 이때 북한 입장에서는 나름 먹고살기 살 만했는지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선전 구호/동요와 [[이밥에 고깃국]] 발언도 각각 1961년, 1962년에 나올 정도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분위기가 강한 편이었다.[* 물론 두 구호 다 오늘날 북한의 경제 실태를 고려하면 [[코미디]]가 따로 없는 상황이지만. 특히 이밥에 고깃국은 [[김일성]]이 1964년에 달성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도 2023년까지도 달성하지 못했다.] 이때 당시를 회고하는 [[김길선]]의 증언에 의하면 문자 그대로 조반석죽을 할 수준으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김길선의 집안은 빨치산 출신 [[핵심계층]]이자 명문가였는데도 잡곡밥이랑 된장국 정도를 배급받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으며 함흥의 부유한 친척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쌀밥 3끼를 먹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잘 살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굶주리진 않았고 노동자들이 여분의 돈으로 술이랑 고기를 좀 먹을 수는 있었던 시대였다고 한다. 계획경제 시스템도 여전히 작동하던 시절이라 가게에는 상품들이 제대로 진열되어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단지 북한 주민들의 구매력이 딸려서 이를 구매하지 못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