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경제/역사 (문단 편집) == [[1970년대]] == [youtube(HQkoNU4t6BQ?si=HMrYWo_2ed-CwEwC)] 1970년대에 촬영된 [[평양]]의 모습 북한 스스로도 이 시기를 황금기라 칭한다. 1960년대 닦아 놓은 경공업 기반을 바탕으로 어느정도 여유롭게 생활을 할 수 있었고, 1970년대 초반부터는 농업 기계화를 추진[* 사실 이 농업 기계화는 소련에서 [[처녀지 개간 사업|1950년대 중반 부족한 식량 생산을 극복하고자 중앙아시아에서 지하수를 개발해 초원 지대를 대규모 농토로 개간한 것]]에 자극 받아 북한도 따라 추진한 것이다. 본래 소련으로부터 각종 농기계의 생산을 위한 기술 이전을 받으려 했지만 소련이 1960년대 중반부터 기술 유출을 통제하는 쪽으로 정책 기조를 선회하면서 기술 이전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농기계 생산을 [[자력갱생]]하려고 했고 수년 간의 노력 끝에 조선형 뜨락또르([[트랙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식량 수요를 충족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고, 어획량도 상당히 많아서 [[명태]]를 무상 배급할 정도였다. [[1974년]]에는 무려 [[세금]]을 [[무세국가|없애는]] 프로파간다성 법령을 통과시키기도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439007|했다]]. 지금까지도 이 영향으로 북 정권이 주민들로부터 징수하는 각종 현금과 현물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세금"이 아닌 "세외부담"으로 칭해진다.]] 또한 이 시기에는 광물 등을 수출하고 받아온 꽤 고급스러운 외제 상품들이 제한적으로나마 풍족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스웨덴]]에서 [[볼보]] 자동차도 들어왔을 정도.[* 그런데 북한 정부는 2019년 '''현재까지''' 이 볼보 차량들에 대한 대금을 납부하지 [[https://www.rfa.org/korean/in_focus/food_international_org/ne-jw-05052017143543.html|않고 있다]]. 스웨덴 측에서는 매년 고지서를 보내기는 하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1973년에 남한보다 1년 일찍 [[평양 지하철]]을 개통시켰고, 1974년에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처음 시작된 것은 미국이지만 방송 전부를 컬러로 송출한 것은 소련이 처음(1968년)이었다. 소련은 인테르비데니에(Интервидение)라는 소련-동유럽권에 이르는 거대한 컬러 텔레비전 표준을 제정하고 컬러 텔레비전을 그야말로 찍어내면서 컬러 텔레비전의 보편적 일반화는 사회주의권에서 먼저 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1970년이 되기 전에 정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고 적어도 70년대 초반에는 컬러 방송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컬러 방송이 너무 늦었다고 사회주의권 사이에서 까일 정도였다.] 실제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위해서 평양을 방문했던 남쪽 인사들은 '평양이 서울보다 좀 발전한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평양에는 호텔에 '''[[비데]]라는 물건'''이 있더라'는 전설적인 발언도 이 시기 전후라고 알려져 있다. 다만 컬러방송이 시작되었다해도 이 당시 북한에서 컬러TV가 바로 보급되었던것은 아니었고, 기존에 판매되던 흑백TV도 몇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상당히 값나가는 물건이었는데 컬러TV는 몇년치 급여에 해당될정도로 비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때의 북한에서는 컬러TV가 있으면 동네 자랑거리이자, 온 동네사람 불러모으기 좋은 아이템 중 하나였다.[* 이는 당시 남한과 마찬가지였지만 남한과 다른점은 남한은 난시청 지역을 제외하면, KBS와 MBC, 수도권과 동남권에서 TBC가 나와서 채널 다툼을 벌였던데 반해서 북한에서 TV채널이라고 해봐야 조선중앙TV 단 하나라서 채널다툼을 할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북한에서 컬러TV가 보편화된것은 중국과 소련에서 중고TV를 대량으로 입수할수 있게 된 이후의 일로, 1970년대 소련에서는 이제 막 컬러TV가 대중에게 보급되었을때였고, 중국은 컬러방송이 시작되었기는 했어도, TV라는 물건 자체가 사치품, 귀중품 취급이었던지라[* 중국에서는 컬러TV가 1980년대까지도 직장인 몇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사치품 취급이라서 컬러TV를 볼려고 동네사람들이 컬러TV있는 집에서 같이 TV를 보던 시절이었다.] 중고거래를 통해 얻을수있는 TV의 양이 한정적일수밖에 없어서 컬러TV의 보급도 마찬가지로 늦어졌던 것이었다. 당시 북한 중산층의 문제점이나 실생활 속 문제점을 꼬집던 [[우리집 문제]] 시리즈를 보면, 지방의 친척이 도시에 나와있는 친척집에서 설탕이 종이가 아닌 비닐포장이 나온다고 놀랍다고 말하거나, 농촌에 사는 친척이 도시에선 이런 물건이 있다고 말하는걸 볼때, 일반적 생필품도 양은 채웠지만 품질은 그닥이었고, 지역별로 어느정도 차이가 있었으며, 사치품은 아예 일반 계층이 구하기는 어렵다는것을 알수 있다. 허나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 등 남북회담을 위해서 서울을 방문했던 북쪽 인사들도 남한의 경제 발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남한은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치면서 경공업은 상당히 발전한 편이었고, 중화학공업화에 뒤늦게나마 본격적으로 나서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경우에는 이렇다 할 중화학공업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차관이나 투자금을 유치해서 중화학 공업을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데 비해, 북한은 기존의 시설과 인력이 사회주의권의 원조와 결합하여 빠른 속도로 중화학공업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애초에 상대적으로 미비했던데다 그나마도 우선순위에서 밀린 경공업은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였다. 어차피 경공업 제품이나 생필품의 질이 떨어지거나 공급이 일시적으로 부족해지는 현상은 북한뿐 아니라 대부분의 계획경제 국가들이 겪었던 문제이긴 했다. 60-70년대 들면서 여타 동구권 국가들도 경공업부분에서의 부진문제를 해결할려고 외자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1972)에 북한의 국가주석이 [[최용건]]에서 [[김일성]]으로 교체되고 김일성의 일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간 경제와 당·군 경제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즉, 한 국가의 경제 내에 군수 산업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수 경제와 군수 산업이 아예 '''따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의 등장 이후 이러한 경제 분리는 더욱 가속화 되어, 잠재적인 경제 성장의 배경을 저하하게 된다. 하지만 70년대의 경제 성장이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졌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둔화의 조짐이 지표 상으로는 나타났을지라도 실제 주민들의 피부에는 와닿지 못하였다. 실제로 고난의 행군을 거치고 난 현재의 북한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시기 까지는 어느 정도 삶이 보장되었으며, 탈북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지상락원이 왔다거나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한다. 곧이어 망할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나 많은 탈북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음식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버리는 수준이었으며 교육, 의료, 의식주 등 거의 모든 부분을 국가가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았다고 한다. 평양 복판에서 놀새족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젊은 세대들은 그때 흥청망청 돈써서 지금 이렇게 못 산다고 불만을 터트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상대적 의미가 아닌 절대적 의미에서 잘 살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시아에서 제일 잘 살았던 일본조차도 1960년대 후반에서야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고려하면 북한은 제3세계에서야 선두에 있었지 실제로는 서방세계는 물론이고 동유럽과 비교해도 국민소득은 떨어졌고, 한때는 대만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 궤도를 달리기는 했지만 이 시기부터 점차 쳐지기 시작했다. 특히 탈북민의 신장으로 실제로 영양 공급을 추정하면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아예 신장의 증가가 드러나지 않는다.''' 남성은 해방 직후 태어난 사람부터, 여성은 50년대 초에 태어난 사람부터 남한 출신보다 키가 작게 되었다는 것이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04062481608|#]] 특히 탈북민의 주 출신지가 분단 전 키가 크기로 유명한 함경도 권역임을 감안하면 생산은 많이 해 대만 수준으로 개인에게 돌아갈 몫이 생겨도, 그 몫을 아주 적게 주고선, 외부 세계의 생활 수준을 주민들에게 낮추어서 알리니[* 당시 북한은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는 북한이고 제일 못 사는 나라는(즉슨 자신들이 선전하는 '[[북한의 한국 묘사|남조선]]'보다도 못 산다는 이야기다) [[일본]]인 것처럼 가르쳤다고 하고, 이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버블경제]]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의식주가 해결된 것이라고 세뇌당하고, 외부인에게는 [[평양]] 등지의 모습 정도만을 보여주며 잘 산다고 속이는 행태가 먹혀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북한의 참혹한 실상이 많이, 널리 알려진 오늘날에도 [[김정은]] 시기 건설된 평양의 신시가지와 (허울뿐인) 무상의료 선전만 보고 북한이 많이 발전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생기는 마당인데, 하물며 북한이 (민생 면에서는) 비교적 어느 정도는 살 만했고 북한의 실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6~70년대에 북한의 선전에 넘어가는 외국인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황금'기였다는 1960~70년대는 과장 좀 보태면 '''오늘날의 [[적도 기니]]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 적도 기니는 국가에 풍부히 매장된 석유로 한때 '''1인당 GDP가 한국을 넘겼을 정도로''' 높았고 경제가 쇠퇴한 지금도 1인당 GDP는 아프리카 최상위권이지만, 독재자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일가와 고위층들이 석유로 번 돈들을 모조리 독식해 자신들의 사치향락에 쓰기에 일반적인 국민들은 석유 발견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최빈국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자원의 저주]]의 끝판왕격 국가이다.]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음식을 버렸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한정적인 이야기로, 위에서도 언급된 명태 이야기다. 당에서 매해 생산량을 책정하고, 해가 바뀌면 또 반드시 그보다 많은 양을 목표로 잡아 주었는데 이는 성장 지표를 강제적으로 할당하여 외부에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걸 진짜 따라가고 아예 초과생산까지 가능했던 게 명태. 풍어였던데다가, 러시아에선 명태 소비가 별로 없어서 러시아 해역에서도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많이 잡아 오라고 하니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엄청난 양이 쌓이게 된다. 그러나 저장설비도 부족했거니와, 국가가 계획적으로 자급자족을 하는 게 목표였던 당시에는 '남는 걸 저장한다' 라는 것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가=당이 필요 생산량을 잘못 책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많이 잡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게 그렇게 많이 잡으면 목표 초과달성이 되고, 이런 것이 곧 김일성의 은혜로 풍어가 왔네 주민들의 충성으로 힘들어보이던 목표도 초과달성이 가능했네 어쩌네 하며 당의 선전에 필수적인 부분이었기 때문. 그리고는 그렇게 초과생산된 양을 목표량으로 잡고 그걸 또 강요하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걸 또 다 나눠준다. 하도 나눠주다보니 명태를 삽으로 퍼서 준다, 북조선엔 명태와 처녀가 넘쳐난다 라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나눠줘도 창고에 쌓이는 양이 더 많아 썩어버리는 일도 있어 그런 건 또 창고 단위로 꺼내다가 썩은 걸 분류하고 남은 걸 강제할당해서 분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명태를 주는 대로 받아가야 다른 배급품을 주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할 정도. 다만 이 덕분에, 당시에는 명태 등으로 젓갈을 담아 판매하는 지금 남한으로 치면 반찬가게 비스무리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는 아직 소련도 팔팔했고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도 살아있던 시기였다. 게다가 이 시기 북한의 경제는 착실하게 몰락의 원인들이 쌓이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80년대 북한 3대 흑역사 중 하나인 [[비날론]]의 개발과 양산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비날론 옷이야 인구가 매년 급속히 늘어나던 당시 기준에서야 쓸만한 정책이었지만 신공법에 전념한다시고 과도하게 예산을 들였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 막장경제의 한 축인 당과 군의 경제가 분리되는 정책도 이 시절에 수립되어 80년대에 가속화 된 것이다. 특히 [[율곡사업]] 등으로 현대화되는 [[한국군]]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이 병력을 100만 대군으로 늘리고 재래식 무기 보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던 것도 북한 경제에 있어서 잠재성장력을 다 깎아 먹는 요인이 되었다. 김일성은 경제성과를 통해 얻은 국부를 곧바로 군비 투자에 쏟아부었고 그 덕에 북한군은 100만이 넘는 대병력이 더해 천 단위의 [[T-62]], [[천마호]] 전차들을 도입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북한의 생산 인구가 반토막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무리한 국방비 투자에 비해 돌아올 미래의 먹거리는 전무했던 상황이었다.[* 비슷한 사례로 1970년대 당시 [[소련]]의 국방비는 '''미국을 뛰어넘을 정도가 되는데''' 소련 경제에 걸맞지 않은 수준의 무리한 군비 증강은 소련 경제에 있어서 큰 부담이 되었다.] 결국 70년대 북한의 경제는 '''미래를 저당잡아 단기적인 과시용 성과를 올리는데 급급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데, 이는 동시기 대한민국이 당시에는 힘들더라도 수십년 내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후대의 먹거리가 되어줄 산업의 씨앗을 뿌린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철도엔지니어 출신의 탈북자 양영일에 의하면 1972년 경까지는 보름 분의 식량이 보장되는 배급표가 할당되었지만 그 이후부터 이틀 분의 식량이 제외된채로 배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도 이미 배급으로만 먹고 살기에는 많이 배고프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서 나물을 캐오거나 산림안전원에게 뇌물을 바치고 산에 소규모 개인농장을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김길선]]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의 보급에도 벌써 악영향이 시작되었는데 세끼 식사는 보장되지도 않았고 보리밥 한 끼와 염장무 반찬이 나오는 정도가 전부일 정도로 파탄났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