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문화 (문단 편집) == [[북한/문화 검열|문화 검열]] == 북한의 문화예술은 철저히 국가와 당, 수령의 뜻에 종속되어 있고, 어떠한 변화의 낌새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높으신 분들]]의 철저한 검열과 통제가 반드시 수반된다. 설령 그 변화가 부정적인 쪽으로 가더라도 그 분들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경우는 없다. '''자기들 밑의 몇 명만 시범 케이스 삼아 [[정치범수용소/북한|어디 무시무시한 곳]]으로 보내버리면 되니까.''' 가장 알려진 검열기구로는 2004년에 보위성, 안전성[* 당시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등으로 구성된 비상설기구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811100018|'109상무']]가 있다. 또 외국소설과 외국노래 역시 금지돼 있으며 외국소설 역시 검열된 것만 읽어야 한다. 보위성 및 안전성은 한국 노래나 영상물, 책 등을 찾아내기 위해 불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하여 적발 후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기도 한다. 북한 정권 초기의 예술가, 문인들은 오로지 김일성과 당의 입맛에 맞춘 작품만 생산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는 소련이나 다른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의 가혹한 통제였다. 예컨대 북한 작가 이기용의 농지개혁을 다룬 [[땅]]은 김일성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이기용은 몇차례나 자아비판을 하고 소설을 다시 써야 했다. 특히 김일성이 마음에 안 들어한 것은 주인공 곽바위의 아내가 곽바위가 감옥에 간 사이 달아나버린 점이라던가 곽바위의 두번째 아내가 지주에게 첩으로 팔려가 남의 씨를 배어 낳았던 여자인 순옥이란 것. 결국 곽바위의 아내는 남편을 버린게 아니라 남편을 기다리다 굶어 죽은 것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으로 수정이 가해졌다. 이기용은 1974년 곽바위같은 혁명영웅에게 '''[[비처녀 논란|순옥같은 첩 출신의 중고품을 주다니 이 얼마나 혁명에 대한 모욕인가? 곽바위는 젊고 예쁜 처녀와 결혼해 마땅하다.]]''' 나의 오류를 지적하신 위대한 지도자 동지에게 감사드린다는 자아비판을 했고 소만일 등의 작가들도 동참했다. 이후 재혼, 조혼같은 주제들은 북한에서 한동안 터부시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엄한 통제와 채찍질만 가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고, 적어도 주류에 편입되어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경우 특정 창작 집단 혹은 공연 집단에 배속되어 거의 평생 동안 일자리가 보장된다. 쉽게 말해 예술가들이 모두 국가에 전속 예술가로 소속되어서 일정 기간동안 작품 몇개를 만들어 내면 대가를 받는 형식이라고 보면 된다.[* 김정일은 그래서 '''남조선의 예술가들은 알바를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데 우리는 국가의 영도 하에 먹고 살만한 환경에서 창작을 하니 우리가 더 최고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먹고살만한 환경을 보장한다고 했지 창작의 자유는 보장한다고 말 안했다. 완전 팥 없는 팥빙수.] 몇몇 예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재능있는 이들은 공훈배우/공훈예술가, 인민배우/인민예술가, 김일성상 계관인, 김일성훈장 수훈자 같은 굉장히 끗빨있는 호칭을 수여받기도 한다. 물론 이들 집단과 예술인들 또한 모두 국가와 당 등에 예속되어 있고, 항상 당 지도위원([[군대]]의 [[정치장교]]와 비슷함)에 의해 모든 제반 사항이 세세하게 통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술인 대부분의 충성도는 대단히 높은 편이며, 공연 예술의 경우 일단 '기교'는 꽤 먹어주고 들어간다. 1980~90년대 동안 북한에서 내려와 공연한 예술단이나 교예단(서커스단)의 공연은 꽤 화제가 된 바 있으며, 그 동안 대중들은 접할 수 없었던 북한 문화예술의 일부분이나마 체험하고 평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