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인권 (문단 편집) === 정보 통제 === 동독도 검문이 엄격했다고 하지만, 체코나 헝가리 등 주변 국가들로의 여행 및 서독에서 오는 방문자에 대해서는 강한 통제를 가하지 않았고, 국공내전 이후에도 양안 간의 실향민들의 고향 방문이나 서신 교류는 허락되었다. 또한 이란 역시 국민의 외국 여행은 어느 정도 허가하고 있다. 6.25 전쟁은 커녕 남북 양국의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이었던 1947년 8월부터 김일성은 탈북을 막았다. 그 이전에도 38선 북쪽 해주의 바닷가에는 이미 감시원이 100m 간격으로 감시를 하고 있고 친척집 방문만 허용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자신이 먼저 북한 주민이 가족도 못 만나게 막은 것이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821/85904875/1|#]] 이후 김일성은 국민들의 해외 탈출을 엄격히 막아 1953년부터 1994년까지 40여년간 탈북에 성공한 북한 주민이 단 '''1천 명'''밖에 없게 했다.[* 이는 평균 수치로 보면 1년에 탈북에 성공한 사람이 겨우 '''25명'''밖에 없었다는 뜻이며, 2002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수가 연간 1천~2천명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김일성 시대에 국경을 철저히 봉쇄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덤으로 1970~1993년까지 탈북자 수는 한해 10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2060032910300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2-06&officeId=00032&pageNo=3&printNo=15958&publishType=00010|#]] 다만 2020년부터는 [[코로나 19]] 방지를 명분으로 국경을 꽁꽁 걸어잠궈 이전보다 탈북자 수가 대폭 줄었으나, 그것도 김일성 시기보다는 탈북이 '''활발한''' 것이다. [[https://www.mk.co.kr/news/politics/8136360|#1]] [[http://www.datasom.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053|#2]]][* 이 때문에 1987년에 탈북한 [[김만철]]이 북한 최초의 일가족 탈북자처럼 알려지기도 했으나, 사실은 1994년에 김만철 일가의 탈북으로부터 32년 전인 1955년 5월 17일에 황해도 연백에서 일가족 7명을 이끌고 배를 타고 강화도를 거쳐 남한에 귀순한 유기방(劉基邦, 1915 ~ ?)이 북한 최초의 일가족 탈북자로 밝혀지기도 했다. 참고로 유기방은 탈북해 안기부, 보안사, 경찰청, 보훈처, 보사부 등의 관계기관에 60여차례나 진정서를 내고 600여차례나 직접 방문했음에도 귀순자임을 인정받지 못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식모, 막노동꾼 등으로 연명해야 했고, 탈북 31년 뒤인 1986년 6월에야 보안사로부터 귀순자임을 임명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4년까지도 생존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근황은 불명.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51000239130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5-10&officeId=00023&pageNo=30&printNo=22682&publishType=00010|#]]]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20300239104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2-03&officeId=00023&pageNo=4&printNo=22593&publishType=00010|#]] 김일성은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남한은 물론이고, 외국과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류를 금지했고, 김정일은 이산가족 방문을 정치, 경제적으로 이용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이산가족 방문의 명목은 인도주의인데, 이것을 할 때마다 남한 정부는 북한이 요구하는 식량과 컴퓨터, 크레인 등의 제공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구는 인질 잡고 돈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만 이게 성사되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 남한 정권은 민심 얻어 지지율 챙기고, 북한 정권은 원하는 것을 얻으니 양측 정권 입장에서는 상부상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권 교체 후 남한에서 대가 없는 교류를 요구하자 바로 단절해 버렸다. 독재자들은 이제 폐쇄된 자기 나라를 탈출하는 국민들을 사살하기까지 하며, 덕분에 탈북 시도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어떤 한 탈북자의 말로는 사실 군인들이 탈북을 도와주기도 한다고 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탈북을 눈 감아주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그나마 사정이 좋아 뇌물 정도는 마련 가능한 탈북자들에게 뇌물을 받아먹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정 액수의 뇌물을 받는 대신에 탈북을 못 본 체 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자제들이 북중 국경지대에서 군복무하기를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데, 모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오히려 탈북하는 사람은 적당히 뇌물받아가며 넘어가고, 중국에서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철저히 잡는다고 한다. 가족에게 무엇을 전달하든, 혹은 가족도 함께 탈북을 하려든 간에 중국에서 빈 손으로 넘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탈북 브로커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다시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뇌물을 두둑히 준비시키는 듯. 특히 이제는 주민들이 당국의 단속을 피해가며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하는 경향이 늘어,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생겨 뇌물 받기는 더 쉽다. 무엇보다 정규 월급보다 이런 뇌물로 단속원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김씨 일가가 아무리 거리가 먼 평양에서 단속 강화를 실시해도 결국엔 근절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 뿐만 아니라 아예 탈북을 돕는 조직들이 생겨 이들과 연계하여 탈북한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 증언하는 판이다. 2020년 들어 코로나 차단을 핑계로 아예 외부 지원 물자도 받지 않을 정도로 국경을 틀어막고, '폭풍군단' 같이 국경경비대를 견제하는 조직까지 투입하니 다시 굶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죽기살기로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중국 내에서 공공장소에 설치된 [[https://www.mk.co.kr/news/politics/10760358|안면인식 장치]] 등을 통해 이동 통제를 강화됨에 따라, 중국 정부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탈북자들이 이동하기 어렵게 되었고, 1000명이 넘게 탈북했던 2019년과 달리 이와 더불어 복합적인 이유로 비관적으로는 2021년에 탈북하는 사람이 100명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https://www.bbc.com/korean/news-57677894|#]] 보위성도 국경에 연고가 없는 사람을 투입하여, 승진 특혜를 빌미로 간부들을 경쟁시킨다. 이들은 국경에서 주는 뇌물이 아니어도 추후 내륙에서 뜯어먹어도 잘 살 수 있는 자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