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인권 (문단 편집) === 정권 초기의 대규모 저항과 실패 === 이쯤되면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제도가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일 것이다.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극히 강경한 수준의 통제가 시작된 것은 아니고, 지도부가 권력이 달린 문제에는 가장 탐욕스럽거나 길들여지기 쉬운 사람을 이용하여 매우 신속하게 움직이고 외세에는 적당히 굽신거리고 나서,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통제를 계속하여 강화하며 반대파를 숙청해 현재 상태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다만 버텨야 하는 경우에는 핵개발의 사례와 유사하게 매우 질기게 버텼다. 지도부가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무척 탐욕스럽고 어떤 비열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기에 북한 일반인들이 힘들게 살고 불만을 가져도 항상 이들을 때려잡을 궁리만 위에서 하기 때문에 이런 실태는 유지되는 것이다. 심지어 6.25전쟁 당시에 남한에서조차 인민군이 점령하던 자리에서는 권력에 길들여지기 쉬운 머슴 같은 사람들이 북한 당국이 주는 권력에서 오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등 자극적인 쾌락에 빠져 김일성에 협조하여 일반인들을 서슴없이 탄압하는 경우도 많았다. 인민군보다 공산당원 같은 사람들이 그래서 더 잔혹했다고 한다. 같은 유대인을 탄압하는 나치 수용소의 [[카포]] 같은 직책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엄연히 인권 탄압이 심했기에, 해방 이후의 인권 탄압도 주민들이 심각성을 모를 여지가 있었다. 그래도 [[꺼삐딴 리|소련군이 대놓고 주민의 시계를 빼앗거나]] 심하게는 강간을 하는 등[* 굉장히 광범위하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워낙 남한에 알려지지 않은 탓에 '''한국인의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는 이런 증언마저 노인들의 허풍이라고 여기며''' 러시아 여군이 그렇게 해준다면 좋은 줄 알라고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28260|유머 컨텐츠로 소비되는 비극]]이 있었다. 당연히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저런 일이 일어났을 때 속초나 철원은 북한 땅이었다. 이런 북한의 인권이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친인척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다.] 북한 주민이 느낄 정도로 횡포가 심했으며, 정부 수립도 아니고 소련군 진주 1년도 안되었던 1945년에도 [[신의주]] 같은 곳에서는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할 정도의 외세의 지원을 받아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20명이 사망한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운동이 있었다. "자 쏠테면 쏘아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죽어도 좋다!"라며 학생들은 용감히 저항했지만, 김일성은 이미 이를 탄압할 권력을 탐하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 진압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학생이 [[함흥]]에서도 비슷하게 숨지기도 했고,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제공하는 권력에 눈이 멀어 '''기독교인을 탄압하던 목사인''' 김일성과 정실 관계에 있는 [[강량욱]] 목사에 대한 테러가 있었다. 심지어 공산당 사무소에 방화를 한다든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들고 무장 투쟁을 한 사례까지 있었지만 이미 김일성의 무리는 땅은 억울하게 '빼앗긴' 것이라며 지지자들이나 기회주의자들에게 세뇌를 시키며 광기를 부추겼다. 이건 못할 짓이라고 농민들이 이런 이간질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기회주의자들이 무력이 더 강하고 외세의 지원[* 소련이 김일성에게 속은 면이 있었다. 8시간 노동 같은 설명만 듣고 소련의 인사들은 김일성이 사회주의적인 활동도 제대로 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북한 내부에서도 소련의 장점이 아니라 김일성이 친일파라도 돈만 내면 용서해버린다는 식의 갈등이 있었고, 그것이 알고 보면 앞서 언급했다시피 다른 8시간은 사상 교육을 받고 자는 시간을 포함해서 8시간만 쉬는 것이었다. 소련이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뒤에서 이런 통수를 많이 치고는 했다.]도 받아서 소용이 없던 것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98109#home|#]] 한편 소련 앞에서는 술자리를 베풀면서 철저히 가면을 썼기 때문에 북한 사정을 잘 모르던 소련은 그냥 자신의 충복이 되어줄 것으로 믿어 김일성 우상화를 돕기도 할 지경이었다. [[함석헌]] 같이 북한 민주화에 실패한 사람이 남한 민주화에 기여를 한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의식주를 보장해준다던 '[[이밥에 고깃국]]' 같은 주장을 설파하고, 항일 운동 경력을 과장을 섞어가며 주장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고, 공은 김일성 자신이, 과는 당간부 같은 남에게 돌아가도록 권력 기관 등을 동원한 공작을 펼쳤다. 이런 행태가 지금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누구나 있는 인간의 악한 본성과 공포를 이용하는 데 김일성이 지능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지주 "계급"으로 몰려 월남한 소설가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라는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의도적인 교육 차별로 아직 사람들이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이용하여 지주를 "하층 계급"처럼 만들고 농민을 "상층 계급"처럼 만들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토지개혁을 통해 빈농꾼이라는 이유로 순식간에 농민위원장이 된 사람이 있고, 마름도 과거의 소행이 두려워 지주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토지개혁도 농민들에게 땅을 준다고 해놓고서는 사실 무거운 세금을 물려 [[일제강점기]]보다 심하게 이에 반발하면 그냥 사형을 시키고는 했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70510010003102|#]] 공산당 간부 같은 사람들은 부자들, 착취와 거리가 멀던 교회나 성당의 돈이나 재산을 갈취하다시피 하고, 일본인에게도 돈을 뺏기지 않던 평양 기생들의 서비스를 돈 없이 즐기면서, 남들은 이들의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만 권력 때문에 이를 즐길 수 있다는 식으로 쾌락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권력의 단맛을 본 농민위원장 같은 사람들은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더 위에는 아부하고 아래를 탄압하였고, 이런 싸움에서 지면 인생이 끝장날지도 몰라 더 싸우게 된다. 한국 교과서에 실린적 있는 작품이다. 황순원은 이 작품을 통해 존중과 사랑만이 이 비극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gounikorea&logNo=221314977608|#]] 작품의 배경은 평양 교외의 '양짓골'이라는 시골이나 북한 전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현대 한국에서도 아무 갈등을 하나 꼬집어 이에 대한 피해의식을 부추긴 다음, 피해자라고 주장되는 권력욕이 있는 사람들에게 높은 자리나 좋은 곳에 거주할 특권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괜히 북한에서 이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사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좀더 자세한 40년대의 저항과 갈등을 확인하려면 [[https://www.joongang.co.kr/search/news?keyword=%EB%B9%84%EB%A1%9D%20%EC%A1%B0%EC%84%A0%EB%AF%BC%EC%A3%BC%EC%A3%BC%EC%9D%98%EC%9D%B8%EB%AF%BC%EA%B3%B5%ED%99%94%EA%B5%AD&sfield=all&sourceCode=1,3&accurateWord=%EB%B9%84%EB%A1%9D%20%EC%A1%B0%EC%84%A0%EB%AF%BC%EC%A3%BC%EC%A3%BC%EC%9D%98%EC%9D%B8%EB%AF%BC%EA%B3%B5%ED%99%94%EA%B5%AD:&page=5|이 연재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성향에 무관하게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6525|프레시안]] 등지에도 인용된 내용이다. 1949년에도 [[동아일보]]에서는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1%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D%B4%EB%B6%81%EB%8F%85%EC%9E%AC%EC%9D%98%20%ED%98%84%EC%8B%A4%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20-03-05%22%2C%22endDate%22%3A%221999-12-31%22%7D|이북독재의 현실]]'이라는 연재물을 싣고는 북한 사람들이 보초를 서가며 라디오를 듣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지주 같은 관계는 남한보다도 평등했음을 역설하며 북한 농민들이 '''세계의 그 어느 농민보다 과중한 현물세를 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앞서 언급한 성분제를 통해 제도화되고, 심지어 일부 탈북자조차 지위가 낮았던 사람은 북한에서 높았던 사람에 대한 증오가, 높았던 사람은 높은 신분을 가진 것에 대해 거들먹거리는 경우가 있다. 기득권층은 하류층의 분노를 막기 위해 이들을 채찍질해야 하므로 이런 인권 유린을 유지하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여기에 정보 유통을 막는 사회가 되니 서로가 진정으로 나라를 해방시키고 싶은 선량한 기득권층이나 극심한 탄압이 있는 하류층의 사회를 서로 몰라 무지로 인한 갈등은 더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6.25 전쟁]]을 통해 남북간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고,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자신의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모조리 뒤집어 씌워 권력의 견제를 무력화하였다. 이는 김일성 옆에서 막대한 혜택을 누리리라 믿은 사람들에 의해 가능해진 일이었다. 밀고를 많이할수록 '당생활에 충실하다'고 하여 더 출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남침이라는 것도 모르도록 남침 당일 "남한이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다"고 발표하는 등 치밀한 계획이 있었고, 이 전쟁에 가담한 사람이 아니면 이를 알 기회가 적었다. 남은 불만 세력은 김일성의 파벌의 감시를 바탕으로 [[8월 종파사건]]을 통해 없애버릴 수 있었다. 이 이후 [[도서정리사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문자 그대로 '''마르크스 책조차 가혹한 검열을 당할 정도로''' 극심한 검열이 가해졌다.] 등을 통해 비 주체사상계 사회주의 관련 문화도 탄압에 대상이 되게 되었고, 주민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원래의 공산주의와도 반대된다는 것을 모르게 하였다. [[려행증]] 제도, [[생활총화]] 같은 현재 북한의 인권탄압을 상징하는 악습들도 반대파를 숙청한 뒤부터 실시한 것이다. 동구권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할 무렵인 1980년대 후반에는 이미 북한이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