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인권 (문단 편집) ==== 북한 국민들의 투쟁 ==== 북한이 언론통제를 통해 반정부 저항을 꽁꽁 숨겨서 '북한에서는 지하에서도 반정부 투쟁이 없을 것이다'라고 착각하는 외지인까지 생길 정도이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이러한 착각과는 달리 북한 내에서도 3대에 걸친 학정을 묵묵히 견디기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낙서나 [[삐라]] 등으로 소극적으로 반체제 저항을 보는 경우까지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탈북민 조사에 따르면 2010년대 기준 60%대가 그 사례가 있다고 전해진다. [[https://ipus.snu.ac.kr/wp-content/uploads/2022/04/%EA%B9%80%EC%A0%95%EC%9D%80-%EC%A7%91%EA%B6%8C-10%EB%85%84-%EB%B6%81%ED%95%9C%EC%A3%BC%EB%AF%BC-%ED%86%B5%EC%9D%BC%EC%9D%98%EC%8B%9D-%EB%82%B4%EC%A7%80-2.pdf|출처(pdf)]] 2023 북한인권보고서에서도 지하 교회 신도를 공개처형한다는 등의 증언이 언급되었지만 그 지역 내에서만 알게 할 뿐이지 다른 지방 사람도 그것을 모르게 하는데, 이는 일단 누군가 저항한다는 것 자체가 해롭다고 여기고 모두가 북한 정권에 복종하듯이 보여야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의 저항 활동을 철저히 숨기는 것에서 기인한다. 북한 사람들도 이제는 시장 경제를 원하는 것이 주류이긴 하지만, 장사를 풀어주는 등 약간만 유화책을 시행하면 굉장한 것인 줄 알고 지지도가 좀 올라간다. 하지만 장사를 많이 하거나 외부 문물을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당연히 자신의 체제를 비관적으로 본다. 그런데도 쥐도 빠져나갈 구멍 없이 이런 소식을 철저히 숨기므로 외부 세계에서 '북한은 지하에서도 저항 활동이 없나 보다'고 착각할 정도로 잘 모르는 것이다. [[자유조선]] 같은 조직이 북한 내부의 저항을 지향하고 실제로 북한 국적자와 연락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2020년대 이후 잠잠해졌으며, 이들의 활동은 북한 매체에서 숨겼다. 2021년 7월경에는 평양 일대와 원산, 청진, 신의주 등 북한 내 주요도시에 SD 카드가 유포되기도 했는데, 이 SD 카드에는 "'''김정은을 몰아내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 사회를 세우자'''"는 메시지를 담은 영상,[* 이 영상의 자막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뭣 때문에 육체도 넋도 제 것으로 살 수 없습니까. 나라는 독재 미치광이의 천국이 아닙니다. 처음엔 두렵지만 용기 내어 소리칩시다. 내가 함께할 것이고, 전체 인민이 함께 할 겁니다. 독재타도! 민주조선 만세!'''" 거기에 그 영상의 배경 음악은 북한 노래 '기다려다오'로, 전반적 가사 내용도 '광복의 그날 오면 다시 만나자'이다.] 납북간의 첩보전을 다룬 남한 영화 [[베를린(영화)|베를린]], 북한이 [[미얀마|해외]]에서 [[전두환|남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던 사건인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영상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2896&Newsnumb=20210712896|#]] 게다가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임수경]]이 무단 월북하여 참가한 바로 그 축전이다.] 이후인 [[1989년]]부터 김일성의 사망 1년 전인 1993년까지는 북한에서 체제에 대한 불만과 식량난으로 인한 폭동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남한 신문에 상당히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는데, 물론 김일성의 사후에 북한의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유'는 원상태로 돌아와 [[송림사건]]처럼 시위가 일어날 것 같으면 '사회기강을 잡아야' 한다며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시위를 철저히 막는 나라가 되었다.[* 특히 [[김정일]]의 명령으로 평양에도 탱크가 돌아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https://www.dailynk.com/2021001-2/|#]]] 하지만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도 김정은 시기인 2012년에도 [[해주시]]에서 꽃제비가 보안원에 의해 폭행치사한 것에 분노하여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130305/53460685/1|#]] 심지어는 1991년 8월과 1993년 4월에 [[신의주]] 지역에서 '''김일성 부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수천~수만 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는 증언까지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9270009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09-27&officeId=00009&pageNo=2&printNo=7913&publishType=00020|#]]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28573|#]] 물론 북한은 [[평양방송]] 등을 통해 이들 소식에 대해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거짓 모략보도' '남한언론의 공작'이라며 적극적으로 부인했으나, 북한의 주장의 신뢰성이 낮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들 시위의 존재를 무작정 사실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전자는 시위대에 대한 군과 경찰의 대응이 북한의 대응이라 하기엔 '''이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인도적이었다는 것''', 후자는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후속 보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 김일성 시기보다 유화적이던(?) 김정일 시기와 김정은 초기에도 북한에서 이러한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증언이 전혀 없다는 것, 당시 일본에 들어온 북한 관련 첩보 중에는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김일성이 암살되었다]]"는 등의 거짓으로 판명난 첩보도 있었다는 것, 북한 입장에서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도 남을 규모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도 국영 언론사의 언론인들이 전혀 모를 정도로 이를 꽁꽁 감춘다는 것이 언론통제가 강력하고 반체제 인사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려 하는 북한 입장에서도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 결정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도 신의주 지역 탈북자들이 이들 시위에 대해 증언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 등 석연치 않은 점들이 너무 많기에 이들 시위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을 가능성은 없으며, 있었더라도 식량난으로 인한 항의 시위가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94년]] 2월 하순에 평양시 순안구역 [[강건종합군관학교]] 소속 [[위관급 장교]] 10여명이 김일성 부자 타도 모의, 정확히는 김정일 암살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강건종합군관학교 운동장에서 당간부 및 주민 1천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에 처해졌다는 주장이 있다.[* 심지어 처형될 군인들의 가족을 맨 앞줄에 세운 뒤 이들 앞에서 사형수들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개처형 현장에 강제동원된 평양 주민들은 당간부의 선창에 따라 '반역자'라는 구호를 부르며 이들에게 돌을 던졌다고 한다.] 이를 전한 [[소식통]]의 말로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중국으로 탈출해온 한 평양시 거주 화교로부터 이처럼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북한 내에서 이 화형이 김정일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아는 사람 하나 건너 들은 소식'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낮은 것 같다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북한 인권 실태가 본격적으로 해외의 관심을 끌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 그 화교가 중국 관계당국에 화형 사실을 폭로하는 편지를 보냈다가 북한 당국의 서신검열에 적발되고 북한 안전부 요원이 집에 찾아오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껴 탈북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화형 사태가 후술할 해주폭동마냥 날조된 사건일 가능성은 낮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60800239101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6-08&officeId=00023&pageNo=1&printNo=22709&publishType=00010|1994년 6월 8일 조선일보 기사]] '[[백두혈통]]'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 사건인 만큼 희생자들의 인척들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남김없이 완전통제구역에 끌려갔을 것만큼은 확실시된다. 그리고 1976년에도 [[해주]]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시위 역시 전술한 시위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와 파장이 막대했다는 사건이었는데도 북한 전문가들과 유명 탈북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짓/과장 증언으로 논란이 된 탈북자들조차 전혀 이야기하지도 않고 인터넷 일부 글에 떠돌아다니는 글 외에는 있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는 '''날조된 사건이다.''' 사실 합하면 대충 50만 명이 넘었을, 도시 둘[* 해주, 개성. 애초에 해주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데 난데없이 개성 사람들을 '폭도들에게 선동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산간벽지와 정치범수용소에 집어넣었다는 것부터가 일관성이 없는 소리다.]의 인구를 모조리 [[함경도]] 산간벽지로 추방하고 정치범수용소에 집어넣었다는 것과[* 그럼 오늘날 개성과 해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근 지역과 평양에 살고 있던 사람들 중 충성심이 '''강한''' 사람을 이주시킨 거란다.(...) 애초에 북한에서 평양을 '혁명의 수도'라고 부르며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성심이 약한 사람도 아니고 강한 사람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킨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다만 같은 해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나자 전쟁에 대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노약자와 충성심이 약한 것으로 판단된 성분 불량계층을 평양에서 오지로 이주시킨 것은 사실이다.] 시위 진압 사망자가 3만 명에 달했다는데도[* 실제 사건 중에서 시위 진압 사망자가 만 단위를 넘어선 경우는 [[사담 후세인]]의 1991년 시아파 봉기 무력진압 정도가 있긴 하다.] 이를 아무런 증언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감추었다는 것은[* 이는 이런 반정부 시위를 북한 언론이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북한이 아무리 자신들에게 불리한 요소들을 감추려고 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도시 둘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마치 없는 사건인 것처럼' 완벽하게 감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의 폐쇄성과 인권 탄압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유치하고 허무맹랑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수준으로 거짓임이 티가 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