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분청사기 (문단 편집) == 개요 == {{{+1 粉靑沙器}}} 분장회청사기(粉裝灰靑沙器)의 준말로 회색이나 회흑색의 태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마무리한 도자기. 분청자, 분청자기라고도 한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에 존재했다. 당대에는 분청사기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회흑색 태토(회청)에 백토로 마무리한(분장) 사기라는 뜻에서 분장회청사기라 명명했다. 청자의 청색에서 백자의 백색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위치한 과도기적인 양식으로도 볼 수 있다. 청자와 백자에서 주로 느껴지는 매트함, 우아함과는 다른, 다양한 텍스쳐와 질감의 친숙함이 돋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13세기 경 청자에서 모티브를 얻어 변모, 발전한 자기로 [[조선]] 태종 때부터 약 200여년간 유행했으며, 특히 세종~세조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16세기 전반부터 점차 쇠퇴했다. 백토를 다양한 방법으로 분장을 하여 무늬를 그렸다. 초기에는 꽃이나 나비 등의 모양을 도장처럼 찍어서 무늬를 만드는 인화기법, 상감을 넣어서 문양을 빚는 상감기법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후기엔 크고 굵은 귀얄이라는 붓으로 백토 분장을 하는 귀얄기법, 백토 물에 담갔다 꺼낸 분장기법, 백토 물에 담갔단 꺼낸 뒤 무늬를 그리고 무늬 이외 배경을 긁어내는 박지기법, 귀얄기법을 사용한 후 철사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기법 등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무늬를 만들었다. 초기엔 관공서와 민간 양쪽에서 분청사기를 만들었으나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 일대에 관요가 설립되고, 관요에서 백자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분청사기는 생산량이 점점 줄어들고 쇠퇴한다. 당대의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었던 셈. 현재도 분청사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 비해 유명세가 덜 한 편이다. 그러나 전자와는 다른 소박하고 순박한 형태, 친숙함, 나아가 텍스쳐와 문양을 통한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과거와 달리 하나의 도자양식으로 인정받고있다. [[경상남도]] [[김해시]]에 [[http://doja.gimhae.go.kr/main/|김해분청도자박물관]]이, [[광주광역시]] [[북구(광주)|북구]]에 분청사기박물관이, [[전라남도]] [[고흥군]]에 [[http://buncheong.goheung.go.kr/|고흥분청문화박물관]]이 있다. 이 곳은 모두 이름난 도요지가 있던 곳이다. [[http://mahan.wonkwang.ac.kr/culture/2000-3/p5-2.htm|도자기에 대하여 관련글. 참고하자.]] [[https://www.youtube.com/watch?v=RrobB46q60U&ab_channel=YTNDMB|한국사 과학 探 - 자연을 담은 도자, 분청사기 / YTN DMB]]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