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경 (문단 편집) ==== 역사 ==== 불경의 한문 번역은 [[후한]] 대부터 개시되었는데 초기 [[번역가]]들은 주로 [[안세고]]와 같은 [[호승|서역승]]들로서 구술로 번역한 것을 제자들이 베껴적는 형태로 번역됐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번역했다기보다는 산스크리트어가 속화한 프라크리트나 [[팔리어]], 중앙아시아의 [[토하라어]]에 기초해 번역된 때도 있어 번역의 질은 중구난방이다. 초기 번역은 후대의 번역에 비해 그 내용이 대폭 생략됐거나 음역이 다른 등 차이점이 상당하다. 어쨌든 그 후에도 불경은 꾸준히 번역되다가 북조 서역승 [[쿠마라지바|구마라집]]이 엄격한 기준을 두고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해 번역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당나라|당]] 대에 들어서면 [[현장]]이 [[인도]]에 다녀와 불경을 당시 언어 상황에 맞게 재번역하여 그 후에는 [[현장]]역 불경이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로 [[반야심경]]은 현장역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현장역을 '신역', 그 전의 번역을 '구역'이라고 칭한다. 중국으로 유입된 외국인 승려 이른바 호승 상당수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으며, 대표적인 번역가 중 한 명인 쿠마라지바는 신장의 [[쿠차]] 출신이고 현장 역시 중앙아시아와 북인도 일대를 주로 답사했던 사람이다. 즉 한문 경전은 중앙아시아의 불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 밖에 없었다. 송나라 대에 들어서면 거의 대부분의 경전이 이미 한문으로 번역된 상황이 되면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업도 크게 축소되었고,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해오던 중앙아시아 불교계가 이슬람이나 마니교,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등에 자리를 내주며 쇠퇴하자, 새로 경전이 유입될 여지도 감소하였다. 번역 사업에 매진하는 승려들이 줄어든 결과 경전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교종]] 불교의 교세가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불교)|선종]] 불교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한다. 일본의 불교학자로 티베트 불교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기도 한 미치하다 료오슈의 경우 명나라 때는 새로 불교 경전 번역이 없었고[* 명나라는 티베트 불교를 적대시하는 입장이었으며, 중앙아시아의 위구르인들의 마지막 불교 왕국이던 카라 델 왕국도 16세기 초 멸망한다.] 청나라 때는 티베트 불교가 전통 중국 불교의 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청나라 후반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대를 중국 불교의 암흑기로 평가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