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시절 === 전통적인 불교국가이던 [[일본]]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숭유억불]]의 조선이 사라지자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결합하여 주변을 착취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사실 철저한 [[유교]] 국가를 지향한 조선시대에서 불교의 사회적 취급은 국가의 [[노비]] 취급, 도성 출입금지 등 말 그대로 개차반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에도 막부]] 내내 불교국가였던 영향으로 승려의 지위가 높아, 조선시대보다는 일제강점기의 대접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인들을 이간질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던 일제의 계책이긴 해도 어쨌든 일제는 불교계를 대접해 줬으며, 그 결과 수많은 [[승려]]들이 친일로 변절하고 결국 당시의 [[한국 불교]]는 거의 일본화되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시절엔 친일 승려들이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비행기 등 군수품을 만들기 위한 위문 헌납금 모집 운동을 벌여나갔다. 친일 승려의 악행은 임혜봉 스님의 저서인 「친일불교론」과 「친일 승려 108인」에서 낱낱히 고발되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 때문에 해당 책에 실렸던 [[최범술]] 스님의 유족들과 [[민문연]]에게 [[너 고소]]를 당했지만 [[http://www.fnnews.com/view?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1580408&cDateYear=2009&cDateMonth=02&cDateDay=25|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효당 최범술 스님은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정치가였는데, 불령선인회에서 [[천황]] 암살을 모의했으며, 불교 계열 항일비밀단체 '만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엔 정치가로서 제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다이쇼대학]]에서 불교를 배워온 대처승이란 이유로 같은 불교 내에서 평가절하되었는데, 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서 활동해서 친일 논란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뿐만 아니라 대놓고「최범술: 불령선인회와 만당에서 활동 그리고 친일」이란 저서에서 최범술 스님의 친일행각을 고발하였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ligion&no=8538|「친일 승려 108인」에 대한 소개.]] 물론 그 와중에 불심 깊은 촌부들을 꼬셔서 전 재산과 같은 논, 밭 등을 헌납하게 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사실 이것이 꼭 불교 세력이 강했던 [[고려]]나 친일승려가 판치던 [[일제강점기]]만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판소리]]에서도 나올 정도로 [[조선]]시대에조차 치부(治富)하는 엉터리 땡초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김정한]]은 [[사하촌]]에서 이런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있다.] 그 동안 조선이라는 왕조 하에서 수백 년을 억눌려 있었으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을 하며 사리사욕을 탐한 점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의 예와 같이 [[일본]]과 [[일본 불교]]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과 [[한국 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훌륭한 승려들도 꽤 많았다. 당시 외국 교민들의 불교계는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