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친일 논란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반불교, version=332)] >佛敎中央敎務院 >慰問金募集 > >시내 수송정(壽松町)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에서는 비상시국을 극복하기 위하야 부내 각 [[절(불교)|사암]](寺庵)과 포교소(布敎所)를 위시하야 황군 위문금을 모집중이든 바 우선 二白五十一[[조선 엔|원]] 六十一전을 [[서울특별시장|경성부윤]]을 통하야 헌납하였으며 게속하야 전 조선 一千五百여 사찰 [[승려]](僧侶)와 신도 二十三萬명을 총동원하야 황군원호에 유루 없도록 지령을 발하고 위문군 모집, 출동부대 송영접대, 출동군인가족 유족의 위문격려 등 총후의 임무에 성심을 다하고 있다. > >1937. 09. 02. 동아일보[[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90200209202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7-09-02&officeId=00020&pageNo=2&printNo=5752&publishType=00020|#]] 일단, 당시 국내의 모든 종교가 사실상 친일논란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을 해야 한다. 친일 문제는 당시 한국의 모든 종교가 거의 피해가기 힘든 [[주홍글씨]]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전체로 보면 극소수 분율이긴하나) 고신이나 침례회 같이 끝까지 저항한 부류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불교]]는 가장 일제와 마찰이 적었고, 개화사상가이자 친일 [[승려]]인 [[이동인]]의 적극적인 협력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제에 순응적인 종교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조선]]은 망할 때까지 [[숭유억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불교의 자유에 제약이 심했던 데다, [[임진왜란]]의 [[승병]] 활약 이후로 조선 후기에 불교의 자유가 조금이나마 허용되긴 했어도 아직까지도 [[승려]]의 사회적 입지는 [[천민]]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잠시 [[신토]]를 앞세운 폐불훼석으로 불교가 된서리를 맞아 약간 침체된것 뿐이지, 전통적으로 [[도쿠가와 막부]] 기간 내내 한국보다 불교가 훨씬 주류였고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높던 사회다 보니, 조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불교를 내세워 접근하기 딱 좋았다. 어느 시대나 상대국에 침투할 때는 상대국의 반발이나 경계심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상대국과 자국의 공통점을 찾아내 그 방면으로 접근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경우는 단지 그 수단 가운데 불교가 있었을 뿐이므로, 불교가 마냥 일제에 순응적이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던 종교로 보기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조선 불교 입장에서는 조선왕조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억압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조]]보단 [[일본 제국|일제]]가 낫다"는 생각을 가진 [[승려]]들이 많았다. [[독립운동]]도 다른 종교계보다 [[불교]]계가 가장 소극적이었다는 주장도 많은데, [[3.1운동]]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이 가장 낮았고[* 물론 아예 참여도 하지 못한 [[가톨릭]]이나 [[유교]]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겠지만.] 내세울 만한 [[독립운동가]]들 또한 [[한용운]]과 [[백용성]], [[김법린]] 정도 밖에 없다는 것.[* [[민족대표 33인]]의 종교별 구성은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이었다. 천도교가 주도한 독립선언에 당시 마침 [[105인 사건]]으로 탄압받고 있던 개신교가 적극 참여했고, [[가톨릭]]은 각 단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불참, [[대종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였던 단군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을 꾸리고 있었다. [[유림]]은 가톨릭처럼 학파별로 참여 여부를 놓고 논쟁하다 뒤늦게 [[김창숙]] 등 2인이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모임이 끝나버린 뒤였다.][* 이외에도 [[105인 사건]]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은 저조한 편이다.] [[이완용]]은 사찰령 이후, 조선 [[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1917년]] 2월 불교옹호회를 설립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일제에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불교옹호회는 불교 신자인 조선 귀족들이 주로 맡았고,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이완용은 후에 [[조선총독부]]가 개설한 삼십본산연합사무소란 불교계 중앙 기관에 평의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가 폐지된 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개편되어 민족주의 성향의 불교인들을 겁박해 완벽한 친일 성향의 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이완용]]은 총독부와 함께 조선내 불교의 친일화의 기틀을 어느정도 닦아놓은 셈이다. [[이종욱(정치인)|이종욱]]은 [[승려]]로 활동하면서 [[월정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고, [[1937년]]에는 여러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던 중에 총본산건설위원회의 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이종욱은 [[창씨개명]]에까지 참여하여 廣田鍾郁(히로타 쇼이쿠)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친일단체였다 해방후 [[미군정]] 시기 미국에 충성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국민회에 몸담은 적이 있다. [[광복]] 이후에도 친일 행적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고 [[1951년]]에는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을 지내며 떵떵거렸다. [[최범술]]은 한때 [[천황]] 암살을 모의했으며 항일비밀단체 '만당([[卍]][[堂]])'[* [[한용운]]을 당수로 내세운 과격 비밀결사. 이용조,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등이 창립 멤버였다. 정작 한용운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멤버마다 말이 다르다.]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실체적인 활동도 하지 못하고 일제에게 압력 받은 끝에[* 애초에 만당의 성향 자체가 과격해서 친일 성향의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찍혀 있었다.] 일제에 투항, [[관동군|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친일 행적은 책임지지 않았고, [[독립운동]] 경력만 인정받아[* 20년대까진 분명히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다. [[3.1 운동]]엔 과격시위를 지도했으며, 임시정부와 소통하여 [[박열]]이 구입한 폭탄을 운반한 것도 사실이다. 30년대부터는 일제와 친일 불교단체의 압력, 최범술 자신의 친일출신 한계([[다이쇼대학]] 출신,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기초위원)로 인해 실체가 불분명할 뿐이다.] [[대한민국]] 초기에 제원의원으로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권상로]]는 "[[소헤이]](僧兵)처럼 한국의 [[승려]]들도 [[태평양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지껄였고, 일본 승려인 누카리야 가이텐과 함께 불교계에까지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불교서적과 연구를 해왔으며,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했다.아래의 위키백과 권상로 문서를 찾아보면 더 많은 정보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변설호는 일제가 [[유정(조선)|사명당]] 비석을 네 토막내는 데 일조했음에도 단죄받지도 않고 89살까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위의 인물들 이외에도 이회광 등의 친일 불교인사들이 많은데, 이들의 친일 행적은 다른 친일인사들이 그러했듯 청산되지도 처벌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불교계의 친일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3년]]에 [[태고종]] 승려인 임혜봉이 <친일불교론>(상하2권)을 펴내면서의 일이다.[[http://news.joins.com/article/2829740|#]][[http://www.dlibrary.go.kr/JavaClient/jsp/wonmun/full2.jsp?v_db=4&v_doc_no=44028|#]] [[임종국(1929)|임종국]] 선생이 명저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것이 [[1966년]]. 친일불교론을 처음 펴낼 때에도 친일인사로 거론된 후손들이나 관련자들의 항의소동으로 출판이 1년간 유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2005년 출간한 <친일승려 108인>에서 친일행적을 밝혔던 최범술의 유족에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판결은 무죄).[[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29|#]] 임혜봉은 이밖에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위원을 맡았고,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등 일제강점기 당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연구해 저서를 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