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대한민국/역사 (문단 편집) === [[고구려]] ===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황제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도]]라는 승려가 또 고구려에 왔고,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라는 두 절을 수도에 지어서 각기 주지로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 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 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또 [[평양]] 근교인 [[황해도]] [[안악군]]의 [[안악 3호분]][* 무덤 주인에 대해서 중국 [[전연]]에서 망명해온 동수라는 설과 고구려 [[고국원왕]](또는 [[미천왕]])이라는 설이 나뉜다. 일단 묵서명으로 보아 4세기 초의 무덤임은 틀림없다고.]에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어서 (주로 중국 군현이 설치되기도 했던) 평안도 및 황해도 지역의 중국계 망명인들을 통해 불교가 민간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광개토대왕]]은 재위 2년(392년)에 평양에 절 9곳을 지었으며, 광개토대왕의 연호 영락(永樂)이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고구려의 네임드 승려들은 주로 평양 천도([[427년]]) 뒤의 기록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장수왕]]의 첩자로써 백제의 [[개로왕]]에게 접근해 백제의 국력을 쇠잔하게 만든 [[도림]](道琳)을 비롯해 신라로 망명해 [[팔관회]]와 백고좌회의 법을 신라에 처음으로 전했다는 혜량(惠亮)이 있고, 중국에서 주로 활약한 승려로는 삼론종을 배우고 중국에서 주로 활약하며 포교에 나섰던 [[승랑]]이나 [[평원왕]] 때 고구려 승상 왕고덕의 명을 받고 [[북제]]로 가서 승려들의 계율을 배워 왔다는 의연이 있었다. 고구려의 승려들은 중국에서 배워온 불교를 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주로 신라와 [[왜국]])에서도 전파했는데, 왜국에 간 승려로는 [[소가노 우마코]]가 처음 백제로부터 받아온 불상을 모실 절을 짓고 비구니 세 명을 출가시켰을 때 하리마에서 고려의 환속승 혜편(惠便)을 모셔다 세 비구니에게 계를 주었다고 한다. [[혜자]](惠慈)가 왜국에 머물면서 [[쇼토쿠 태자]]의 정치 자문 역할을 해 주기도 했으며, 유명한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도 고구려 승려였다.[* 그러나 해당 벽화와 담징의 생몰연도가 맞지 않는다고 담징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 [[영류왕]]이 당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고, [[연개소문]]이 집권한 뒤에도 연개소문이 기존의 귀족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도교를 장려하면서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바꾸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고, 이에 항의하던 승려 [[보덕(승려)|보덕]]이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망명하기도 했다. [[당서]]에는 평양성이 함락될 때 [[연남건]]으로부터 평양성의 성문 수비 임무를 맡았던 [[신성]](信誠)이라는 부도(승려)가 당군과 짜고 밤중에 몰래 평양의 성문을 열어서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어서 고구려 말기 불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연씨 가문과는 멀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