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국사 (문단 편집) == 역사 == 정확한 [[건축]] [[연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단 《불국사고금창기》[*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15년(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연제부인)이 새 사찰을 짓기를 소원하여 불국사를 처음 지었다. 이후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지소부인]]이 크게 개창했는데, 이때 아미타여래상과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봉안했다. 문무왕 10년(670년)에는 무설전을 건설해 화엄경을 강의했고, '''[[경덕왕]]''' 10년(751년)에 그 유명한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면서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다보탑]]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다. 출판사 지학사에서 만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연표에도 751년이 불국사와 석굴암이 중창되기 시작한 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앞부분이 빠지고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나온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석불사([[석굴암]])을 만들었고 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것. 이 일화가 유명해서 김대성이 지은 줄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의 기록이 더 정확할 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불국사 자체가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기에 김대성 혼자서 그런 엄청난 건설을 했다기보다는[* 심지어 그가 기록처럼 시중이라는 고위 관직일지라도, 그런 절을 혼자 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법흥왕 때부터 [[신라]] 국가차원에서 개증축을 해오다가 훗날의 모습의 바탕이 되는 결정적인 중수를 김대성이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아무래도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 더 세세하기도 하고, 삼국유사가 설화적인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또한 사찰 창건 설화들 중에서는 해당 사찰의 역사가 유구하다고 강조하고자 불교가 공인되거나 전래되기도 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는 무리수를 둔 경우도 있는데, 불국사 설화는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대를 창건 시점으로 잡으므로 그런 무리수도 적다.][*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대를 창건시기로 잡는건 무리수라는 얘기도 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527년인데 고작 1년만에 왕경 근처도 아닌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산지가람을 지을 필요도 없고 신라의 불교수용초기단계에 만들어진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사찰은 현재까지 기록도 없으며 발견된 예도 없다. 애초에 불국사고금창기는 조선시대의 기록이다. 신라 왕경 밖으로 사찰이 건립된것은 주로 통일기 이후에 해당하며 왕경이 확대되고 통일 이후 타지와의 왕래에 이용된 길 주위에 건립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엔 김대성이라는 이름은 없고 경덕왕 시절 중시를 지낸 김대정(金大正)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기백(1924)|이기백]]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역사학자들은 정황상 동일인물로 추정한다.[* [[김용춘]] 등 다른 인물을 봐도 ㅊ~ㅈ~ㅅ의 한자 표기가 달라지는 일이 흔한 편.] 어쨌든 중수와 관련한 유명한 설화로 삼국유사에도 실린 김대성 설화가 유명하다. [[김대성]]이 재상급인 중시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고위귀족이 심혈을 기울여 중수하면서 규모가 상당히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성이 중수한 연대는 751년에서 765년 사이로 추정된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중수하였고 여러 부분에서 통일신라의 정형화된 양식이 보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는다. 이때 [[불국사 3층 석탑|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다보탑]] 등이 세워졌으며 2탑 1금당의 가람 (절의 배치된 모양) 형식이 완성되었다.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의 불국사는 건물만 80종·2천여 칸으로, 오늘날 불국사의 8배 규모의 대사찰이었다.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말 기록인 동경유록, 간재집에 의하면 여전히 신라 때의 석탑, 불상, 그림들이 남아 있었고 천 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동경유록에서는 신라왕이 백성의 힘을 이런 쓸모없는 곳에 쏟아부었으니 애석하다고 기록하였다. [[숭유억불]]에 따라 [[불교]]를 천시하던 조선시대 유학자의 기록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왜란 전 불국사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한 번 크게 불타 사라졌다. 지금도 대웅전의 장대석 등을 살펴보면 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불국사 가이드 투어의 설명에 따르면 해당 방화는 처음부터 절을 파괴할 목적으로 방화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경주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 병사들이 굉장한 절이 있다고 구경 왔다가 [[의병]]이나 [[승병]]을 무장시키기 위해 절에 보관 중이던 무기를 잔뜩 발견하고 "'''아름다운 꽃일수록 맹독을 감추고 있다'''" 라는 이유로 본대에 연락해서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얄궂게도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 신자였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는 정확하게는 [[가마쿠라 시대]]에 승려 니치렌이 창시한 [[법화경]]만을 유일무이한 경전으로 떠받들고 다른 경전은 모두 무시하고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련정종]]의 신자였다. 일련종은 법화경을 제외한 다른 경전을 사용하는 일본의 기성 불교 종단을 모조리 배척하는 극단적인 곳이었다. 자국 불교에 대해서도 이 모양인데 법화경 외의 다른 경전도 인정하던 한국 불교에도 자비가 없었다. 게다가 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워낙 조선 [[승병]]들에게 피해를 많이 받았던지라 이미 승병에 학을 뗀 상태였는데 승병을 무장시킬 무기도 발견됐겠다, 그런 명분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조선]] [[영조]] 26년(1750년)에 불국사 극락전이 다시 세워지고 41년(1765년)에 불국사 대웅전이 다시 세워졌다. 1779년 경주 지방 [[유림]]이 지원하여 중창하는 등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1/24/0200000000AKR20160124046300005.HTML|(기사 링크)]] 재건하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조선 말기를 거치면서 사실상 폐허가 되었으며, 당시 다 쓰러져가는 불국사를 조선 말기에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사실 국교가 유교였고 유학자들이 [[불교]]라면 덮어놓고 [[숭유억불|혐오]]하던 조선시대에는 멀쩡한 절도 트집을 잡아서 [[반달리즘|부수고]] 승려들은 부역에 끌고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드리지 않은 절은 왕실 원찰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왕이 불교에 너무 열중한다 싶으면 득달같이 신하들의 상소가 쏟아졌던 때이다. 그런 시대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일개 지방의 사찰을 복원하자고 했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테니, 사실상 터만 남았음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temple.jpg|width=100%]]}}} || || [[조선]] 시대 말기에 폐사지가 된 불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temple2.jpg|width=100%]]}}} || || [[일제강점기]]의 임시 복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c0026408_4d23267f788b7.jpg|width=100%]]}}} || || 1970년대에 복원된 현대의 불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templecontemporary.jpg|width=100%]]}}} || || 현재 가람의 전체 모습 || 이후 [[일제강점기]]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대웅전과 다보탑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다보탑의 석물과 사리함 등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그동안에도 여러 건물이 소실되었다. 원래 일제는 불국사 유적을 축소하여 건성으로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계획을 수정하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0660.html|일제 강점기의 복원계획 수정]]. 이는 불국사의 여러 유적들을 보수공사를 핑계로 약탈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로전 앞에 석등 모양으로 된 사리탑(舍利塔: 보물 61호)은 한때 일본인이 빼돌렸으나 1934년 반환되어 제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가 임시로 복원한 상태로 있다가[* 일제의 복원 공사로 다 무너져가던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와 많은 건물들이 보수되면서 일단은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불국사의 회랑과 난간 등은 복원하지 못했다.] 결국 광복 후 1970년대에 와서야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졌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 당시 돈으로 약 8억 원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하며, 석축과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이나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건물이며, 구품연지가 재건 당시엔 관광객들의 동선을 막는단 이유로 메워버렸고, 복원된 목조 건물도 고려 중기에서 조선시대의 양식을 뒤섞어서 재현한 것이기에 창건 당시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창건 초기의 기단 위에 후대에 다시 지은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 점은 현재 한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절들이 그닥 다를 것이 없다. 유명한 [[도다이지]] 대불전도 나라 시대에 처음 대불을 만들면서 지었지만 현존 건물은 에도 시대에 와서야 세워진 것이고 그나마도 원래 크기에서 축소된 규모였다. [[사천왕사|시텐노지]]는 태풍으로 무너지고 나서는 '''건물 자체를 아예 콘크리트로''' 다 지어버렸다. 나라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그대로 유지된 [[호류지]]나 도쇼다이지 같은 사찰들은 일본에서도 매우 드문 케이스에 속한다. 다만 이 점을 감안해도 불국사 복원 과정이 확실히 엉망임은 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