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랑기포 (문단 편집) == 이후 == 임진왜란 때도 [[천자총통]], [[지자총통]]보다 [[현자총통]], [[별황자총통]]을 애용했던 조선에서는 기존의 천지현황 브라더스를 완전히 대체하진 않았지만 단기간에 주력 화포로 등극했다. 선조 시기 명군에 의해 도입된 [[호준포]]와 경쟁하다 광해군과 인조 시기를 거치며 청의 기병이 주적으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최종승자가 되었다. 총통에 밀린 2인자 격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기존 총통류가 한참 밀렸다. 병자호란 이후 신미양요 때까지 '''조선 후기 주력 화포는 불랑기였다.''' 1810년(순조 10년) 남한산성 주둔군이 보유한 화포 수량을 보면 총 375문 중에 300문(2호 13문, 4호 102문, 5호 185문)이 불랑기였으며 개중에서도 소형인 4~5호가 주력이었다. 근대식 포가는 조선 말엽 개항기 직전에나 도입되었고, 체계적인 탄도학과 포병 이론이 적어도 현재 남아있는 기록과 유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은 발사방식이 복잡하고 오래 걸리며 화약 소모량이 많은 대형 총통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사격 절차가 간단하며 이동이 용이한 소형 화포류를 선호했다. 대형에 훨씬 강력한 [[홍이포]]는 영조 때나 겨우 제작법을 들여왔을 뿐 너무 비싸서 대량양산에 부적합했다. 청의 재빠른 기병대를 주적으로 상정한 조선에게는 가벼워서 운반이 용이하고, 저렴해서 대량생산 할 수 있고, 사격 절차가 간소하며 화약 소모량도 적어 직사로 산탄을 다량 퍼부을 수 있는 불랑기포가 최적이었다. [[신미양요]] 당시에 강화도 해역 포대에 배치된 화포들도 대부분 불랑기였는데 미군 함대에 그토록 많은 포탄을 퍼붓고도 피해를 주지 못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분명 포대 배치는 해협에 진입하는 함정을 일방적으로 두들길 수 있을 정도로 오밀조밀했으나 전근대 소형 화포인 불랑기의 위력이 너무 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