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붕당 (문단 편집) ==== 정조의 [[탕평책]]과 붕당 정치 복원 및 좌절 ==== [youtube(56shhKNHiFA)] 정조는 탕평당의 독주로 척신 정치로 변질되어가자 척신을 배제한 한편, 조정을 청명당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해서 소론 벽파인 [[서명선]], 노론 벽파의 거두인 [[김종수(조선)|김종수]]와 [[심환지]] 등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홍봉한의 척신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벽파가 상당수였다. 애당초 벽파라는 것이 '사도세자 죽어라!'가 아닌 '우린 척신이나 역적인 소론, 남인 애들하곤 못놀겠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벽파가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한 것도 사도세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신원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던 노론의 잘못으로 귀결될 문제고 세자가 죽음까지 당했으니 노론은 반역자가 되어 일망타진 당할 처지가 된다. 실제로 [[채제공]]은 이걸 실현시켜 남인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니 노론 벽파가 여기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지 변수가 터지니 [[사도세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처분 문제]]를 두고 [[벽파]], [[시파]] 등으로 갈라지고 당파들이 싸움을 벌였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는 당파라는 개념 자체 희미해지고 있었고 벽파니 시파니 분류된 것은 [[정조(조선)|정조]] 때의 일이다. 주로 시파가 사도세자에 동정적이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하지만 영조 때는 벽파와 시파 구분 자체가 없었고 [[홍봉한]]의 탕평당과 척신 정권에 [[김종수(조선)|김종수]], [[심환지]] 등이 주축이 된 [[청명당]]이 서서히 반발하고 [[경주 김씨]] 일문이 [[홍봉한]]에 맞서면서 그들과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임오화변]]은 영조의 의지였지 노론은 별 잘못이랄게 없다. [[정조(조선)|정조]]가 [[벽파]]와 대결했다는 증거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인한]]은 영조가 나이를 이유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려고 한 것에 대해서 '세손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도 없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之說)'''을 내세웠다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조선 시대에 [[세자]]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고 세자는 침선(砧選, 궁궐 내부의 문제)의 문제만을 살피면 되지 괜히 정치를 알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이 발언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때는 벽파, 시파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 밝혀지지만 정조의 정치적 성향은 오히려 벽파의 그것에 가까웠고 [[홍인한]] 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별 책임이 없었다. 정작 후에 강경 벽파로 분류되는 [[김귀주]]와 그의 아비 김한구, 사촌 [[김관주]] 및 [[경주 김씨]]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파는 정조를 크게 지지했고 [[김귀주]] 등은 번번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지원사격했으며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에게 세손의 승계(世孫之嗣係)가 당연하지 않냐고 정조를 대리 청정 등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정조는 이어 새로운 척신[* 이때 쯤 되면, 친위세력을 이끌던 [[홍국영]]도 정조의 후원과 뒷배 덕분에 권력을 맛본 상태라 자기 여동생, 즉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내세워 권력욕을 보이던 시기라 새로운 척신이자 간신이 되어 간다.]이 되어가는 [[홍국영]]도 제거하면서 척신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고 [[정민시]]와 소론, 남인, 규장각 출신 소장파가 주축이 된 시파도 대거 끌어들여 오히려 붕당 정치를 다시 열었다. 정조의 경우는 영조와는 달리 붕당의 시시비리를 가린다는 이유로 소론과 노론의 과격파들과 역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한 준론 탕평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온건론자들인 영조 시기의 탕평파의 상당수가 결국 시파에 들어갔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 이후 신해통공과 [[천주교]] 문제, [[문체반정]] 운동 등을 통해 정조는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가 탕평 정치기로 붕당 정치사의 제4기이자 사실상 마지막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붕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지만 사실상 영조와 정조의 왕권 강화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조가 끝내 종기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사실 이 문제는 맨처음 정통성 없다고 생각한 [[선조(조선)|선조]]가 당시 우후죽순으로 유입된 사람들의 사이를 갈라서 자신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려는 것에서 시작하여, 역시나 폐주를 몰아낸 공 이외에 왕위순위에서 높지 않았던 [[인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구축하려고 헛짓거리를 하다가 일을 키웠고, 역시나 왕실권위를 높이려고 하다가 일을 키운 [[현종(조선)|현종]]에, 이 문제를 과격하게 처리하여 자신에게 힘을 집중시킨 [[숙종(조선)|숙종]], 당파의 주장에 사로잡힌 [[경종(조선)|경종]], 왕이 조정자로서 붕당을 조정하려고 한 [[영조]]와 [[정조(조선)|정조]]의 정책방향으로 결국 [[세도정치]]라는 폐단을 키웠다.]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불과 4년 뒤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가 죽고 [[순조]]의 장인이 된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집권[* 엄밀하게 따지자면 김조순은 정조의 친위 세력으로 김조순 시기를 세도 정치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존재한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본격화되는 것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시대부터이다. 다만 막후에서 여러 가문들과 정계를 좌지우지하였다는 측면에서는 세도정치라고할 수 있다.]하면서 완전히 시파가 득세하게 된다. 이것으로 실질적으로 붕당의 역사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