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라질/역사 (문단 편집) == 식민지 시대 == [[대항해시대]]에 들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의 [[중미]]를 발견한 지 8년 만인 서기 1500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카브랄]]이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 그리고 새로이 발견된 이 땅이 1494년 스페인과 체결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른 경계선(서경 43도 37분)의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할 당시 포르투갈 측의 강한 요구로 기존의 경계선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는 점과 새땅을 왕창 발견하고도 왕실에서 놀라지 않았단 얘기를 볼 때 이미 포르투갈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나 [[바르톨로뮤 디아스]] 등의 항해 과정에서 [[아메리카]]까지 가봐서 아메리카 신대륙을 알고 있었단 얘기도 있다. 물론 증거는 없고 (사실 리스본의 왕실 문서 보관고에 소장되어있던 기밀 항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겠으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몽땅 날아가는 바람에...) 어디까지나 썰일 뿐이다.] 다만 이 조약 기준 포르투갈의 몫은 지금 브라질보다는 훨씬 작은 해안지역에 국한됐고 이후 포르투갈 개척자들이 내륙 강 상류로 배를 타고 계속 올라가면서 남미대륙 내륙 부분을 대거 추가해 지금의 브라질 국토의 틀이 잡힌다. 스페인인들이 차지한 남미대륙 서해안에서 내륙으로 가려면 [[안데스 산맥]]을 넘어야 하니 포르투갈이 내륙 선점이 가능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점령한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들에서는 금과 은, 구리, 주석, 납, 백금 등등 온갖 지하자원들이 쏟아져나오는데 비해,[*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 은광에서 나오는 은이 스페인으로 들어오면서 유럽의 은 보유량을 7배 정도 늘어났다고 한다.] 포르투갈이 점령한 브라질에서는 자원 개발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 브라질 고원 쪽에서 금과 은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그건 먼 훗날인 [[19세기]] 말의 이야기이다. 이에 실망한 [[포르투갈]]에서는 브라질을 대충 관리하고 대신 그 당시 짭잘한 수익을 올리던 [[인도]] 교역에 집중한다. 이 때 [[명나라]] 관헌들에게 뇌물로 협박하며 [[마카오]]를 영구 임대하기도 한다. [[중국]]이나 [[대한민국|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브라질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브라질 북동부 전체가 광활한 열대우림으로 덮여있었고 소수의 브라질인 식민 개척자들의 힘만으로는 무슨 당시 전기톱이나 다이너마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개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역시 상당수가 열대우림 지역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이 쪽은 기존의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 문명에서 도시도 지어놓고 어느정도 도로 체계도 갖추어놓고 옥수수 밭도 개간을 해놓아서, 개발이 수월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초창기 브라질에 이민정착한 포르투갈인 상당수는 [[세파르딤|세파르드 유대인]]들이었다. 포르투갈에서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이후 이웃나라 스페인처럼 유대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추방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는 기독교인으로 위장한 이후 브라질 식민지로 이주하였고,[* 브라질 외에도 네덜란드로 이주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후 원주민과 흑인 노예를 부리며 플랜테이션 농장주로 살았다.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식민지 운영 인력이 워낙 부족했던 이유로 유대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해서 신분세탁하는 것을 봐주어야 했다. 포르투갈인 대농장주들이 이것저것 재배해보다가 찾아낸 게 "[[빠우 브라질|파우 브라질]]" 이라는 빨간색 염료의 원료가 되는 나무였다. 이걸로 염료 팔아 돈을 벌다가 이후 [[마데이라 제도]] 등에서 재배하던 [[사탕수수]]를 도입해 [[플랜테이션]]을 시작하는 순간… [[계륵]]과도 같았던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있어서 진정한 축복의 땅이 되었다. 브라질 북동부는 이 당시에 [[사우바도르]]를 중심으로 한 플랜테이션으로 엄청난 번영을 구가하였다. 문제는 브라질 북동부 토양이 열대 [[라테라이트]] 토양이라는 점이었는데, 플랜테이션을 짓기 위해 열대우림을 파괴하면 강수량 때문에 표토층이 씻겨나가고 금새 토양이 황폐화되었다. 나무가 다 베어지고 가림막이 없어져 뜨거워진 대지에는 비가 예전처럼 내리지 않게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북동부의 땅들은 점점 가물고 척박해져갔다. 한 때 포르투갈인 탐험가들을 경악하게 했던 브라질 북동부의 광활한 열대우림들은 몇 세기만에 가뭄이 자주 일어나는 건조 지대로 바뀌었다. 1580년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가 후사없이 단절되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모후가 포르투갈 왕족인 것을 근거로 포르투갈의 왕위를 요구하면서, [[동군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에 편입됐고, 1640년 포르투갈이 분리 독립함에 따라 브라질은 다시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맺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사실상 실효[* 두 나라가 한 나라로 합쳐졌으니 남미에 그어놓은 식민지 경계선이 무의미해진 것]하면서 브라질의 포르투갈인들이 남미 내륙으로 대거 진출하게 되어, 오히려 더 넓어진 지금의 브라질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남부지방으로도 진출하여 북동부의 [[사우바도르]] 대신 남동부의 [[리우데자네이루]]가 브라질의 중심지가 된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가 브라질 인근 땅을 노리고 공격을 시도할 때도 있었지만 이들이 상륙한 지점이 영 좋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기아나]] 문서 참조.] 그리고 어차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카리브해 섬 식민지에서 짭짤한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무리해서 열대우림 내륙 지역으로 침투할 이유가 적었다. 오늘날과 다르게 당시엔 땅은 남아돌아도 노동력은 부족하던 시대였고, 노예 무역의 큰 손 포르투갈 외에는 광활한 브라질 열대우림을 개간할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물론 포르투갈과 사이가 나빴던 네덜란드는 노예를 수입 못하건 말건 신경 안쓰고 브라질 식민지를 공격했는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아시아 무역 거점을 두고 서로 다투던 사이였다. 네덜란드의 주요 관심사는 카리브해보다는 아시아 쪽에 있었고, 브라질을 공격한 이유도 브라질 땅이 탐나서보다는 포르투갈 견제 차원에서가 더 컸다.] 일시적이나마 브라질 북동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포르투갈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긴 했다.[* 여담으로 네덜란드인들은 브라질을 정복하는데 실패했지만 대신 안틸레스 제도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면서 결과적으로 브라질 사탕수수 산업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네덜란드의 빅 픽쳐-- 다른 한편으로 네덜란드는 수리남과 안틸레스 제도에 커피 재배를 시도하다 조건이 안 맞아서 실패하고 대신 망해가던 브라질 북동부가 19세기 수리남으로부터 커피 재배 기술을 도입하여 가사회생에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