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란덴부르크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본래 기원전부터 [[게르만족]]의 영역이었던 이 지역에 [[7세기]] 무렵 [[슬라브족]]이 [[비스와 강]] 동쪽에서 건너와 거주하기 시작했다. [[독일왕]] [[하인리히 1세]]가 슬라브족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였지만 이후 다시 슬라브족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 10세기 중반에 [[오토 1세]]는 새로 정복한 지역에 북부 경계지방(Nordmark)을, 브란덴부르크 하펠베르크에 주교령을 설치했다. [[12세기]]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의 강력한 제후였던 [[하인리히 사자공]]의 노력에 힘입어 다시 게르만족이 주도권을 잡았다. 하인리히 사자공의 [[동방식민운동|동진]] 이후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해졌고, 양 [[민족]] 사이의 [[통혼]]이 이루어지면서 이 일대는 서서히 [[독일/문화|게르만화]]되었다.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 출신으로 하인리히 사자공과 대립했던 [[안할트]]의 알브레히트(Albrecht der Bär 1100~1170)는 1150년대에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로부터 북부 경계지방과 브란덴부르크 마을을 하사받았는데, 알브레히트는 이 지방의 슬라브 반란을 진압한 후 스스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을 자처하면서 초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었다. 이후 제국 북동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아스카니아 가문은 이에 힘입어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독일인]]을 베를린이 위치한 중부 경계지방이란 뜻의 미텔마르크(Mittelmark)를 거쳐 [[오데르 강]]을 넘어서 새 경계지방, 노이마르크(Neumark)로 알려진 지금의 [[폴란드]] [[루부스키에]](Województwo lubuskie)까지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경계지방이라고 불리었던 곳은 오래된 경계지방이란 뜻의 알트마르크(Altmark)[* [[프로이센 왕국]] 시절 행정구역 조정으로 인해 현재는 [[작센안할트]]에 속해있다. 여담으로 [[독일 통일]]을 주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이 지역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로 여겼던 당대 독일인의 역사 인식을 알 수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가 되어 지금의 지명에도 남아있다. [[1320년]], 브란덴부르크 아스카니아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주인없는 지역이 되었으나 황제 선출권[* 이미 이전부터 황제 선출권이 있었고 [[1356년]] [[금인칙서#s-2.8]]를 통해 [[선제후]] 작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브란덴부르크가 가지게 된 황제 선출권은 본래 [[슈바벤]] 공작의 권한이었으나 해당 작위는 [[1268년]]에 사라졌다.]이 있던 이 지역을 탐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독일왕]]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가 맏아들 루트비히에게 이 지역을 넘기면서 [[1323년]]부터 [[1365년]]까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루트비히 4세 사후 형제들간의 상속 다툼으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역시 황제 선출권을 탐냈던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 겸 독일왕 [[카를 4세]]가 사위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7세[* [[바이에른]] [[공작(작위)|공작]]으로서는 오토 5세.]를 협박하여 [[1373년]]부터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차지가 되었다. [[1378년]]부터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았던 카를 4세의 차남 [[지기스문트]]는 아들이 없었던지라 [[1415년]], 자신의 독일왕 선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뉘른베르크]] [[성주]](Burggraf)[* 성관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6세에게 브란덴부르크를 하사하였다. 프리드리히 6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브란덴부르크)|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약 500년의 세월에 이르는 기나긴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초창기 호엔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 토착 귀족들과 갈등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공인되자 공식적으로 개종[* 당시 선제후였던 [[요아힘 2세 헥토어]]는 1539년 이미 [[마르틴 루터]]의 주관으로 개인적으로는 양형 영성체를 거행하며 [[개신교]]에 호의를 보였으나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공식적으로 개종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한편,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고 오데르강과 슈프레강의 수운을 이용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 매섭게 세력을 확장했다. 이 시기 결혼동맹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덕분에 [[프로이센 공국]]과 더불어 약간의 분란이 있기는 했지만 [[클레베]](Kleve), 마르크(Mark), 라벤스베르크(Ravensberg) 등 [[라인란트]] 일대도 상속받아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정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30년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에게는 다행이게도, 이 시기 호엔촐레른 가문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프리드리히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군주]]들이 연이어 배출되었다. 이들의 치세에 [[프로이센 왕국]]은 쭉쭉 성장해서 남독일의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북독일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이라는 [[독일어권]]의 양대 강국으로 성장했고, 프로이센 왕국의 핵심 지역인 브란덴부르크, 특히 베를린도 당연히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이후로도 프로이센의 성장세는 거침없었고, 당연히 브란덴부르크도 마찬가지였다. [[1848년 혁명]] 당시에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와 더불어 포츠담에 정부 기구가 설치되었을 정도. 그렇게 [[독일 제국]] 시기를 거쳐 [[바이마르 공화국]]까지도 잘 나갔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대가를 톡톡히 치러 원래 주 영토의 1/4에 이르던 노이마르크 지방을 폴란드에게 내어주었고 이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이 추방되었다. 급기야 [[동독]]이 수립되자 주 제도가 없어지면서 [[1952년]] 이후로 브란덴부르크 주는 사라졌다. [[동서독 통일|독일이 다시 통일]]을 이루는 [[1990년]]이 되어서야 브란덴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다만 부활한 주 경계는 [[작센-안할트]], [[작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과 땅을 서로 뜯고 뜯긴 관계로 프로이센 왕국 시절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작센-안할트에서는 주로 삥뜯은 편(...). 거기에 주 내부 행정구역 경계선은 전쟁 이전에 비해 완전히 바뀌었다. 전쟁 이전에는 지역별로 덩어리진 경계선이었다면 현재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경계선이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북서부 프리그니츠나 남부 지역같이 베를린에서 거리가 떨어진 곳들은 그 지역별로 묶었지만. [[파일:브란덴부르크 주 프로이센.png]] ^ 구 프로이센의 브란덴부르크 주를 현 독일-폴란드 국경 위에 보여준 지도. 제2차 세계 대전 후 브란덴부르크 주의 국경 변화를 볼 수 있다. [[서독]] 정부가 [[오데르-나이세 선]] 국경을 인정하고 이동 영토에 대한 주장을 취하했기에 [[오데르 강]]/나이세 강 너머 동쪽의 노이마르크 땅을 되찾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