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날론 (문단 편집) === 리승기의 개발 === 1939년, 당시 리승기 박사는 '합성1호'라는 시제품의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엄청난 자랑거리였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朝光)도 '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해방 때까지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12명에 불과했으며, 일본에서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2명 뿐이었으니 정말 드문 일이긴 했다. 그러나 비날론은 상용화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가 이미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전쟁통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102828_31844_1350.jpg]] 리승기 박사는 광복 이후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부임했으나, [[1947년]]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 [[담양군]]으로 내려와 있다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31일, 북한 산업성 부상 리종옥의 설득으로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 출신 제자들까지 전원 같이 데리고 [[월북]] --인생 최악의 오판-- 을 해 버렸다. 이때 월북한 박사 출신으로는 동경제국대학(현 [[도쿄대학교]]) 공업박사 최삼열, 동경제대 농예화학 학사, 화학과 박사였던 김량하 등 111명이었다. 당시 북한의 주요 과학자들 대부분이 월북 과학자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